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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III/Thinking

만물은 무(無)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

전호근의 한마디로 읽는 중국철학┃⑫왕필

왕필의 노자주는 이전까지 양생술과 권모술수에 갇혀 있던 도덕경을 형이상학의 층위로 끌어올려 노자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는 도덕경을 한 마디로 ‘숭본식말’(崇本息末), 곧 근본을 숭상하고 말폐를 없애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만물은 무(無)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는 그의 말에는 새로운 질서는 마땅히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 담겼다.

성은 왕(王), 이름은 필(弼), 자는 보사(輔嗣?)다. 후한의 남양 태수를 지냈던 역학(易學)의 명가 왕창(王暢)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형주 자사 유표의 외손인 왕업(王業)으로 본래 왕개(王凱)의 아들이었으나, 족형제이면서 건안칠자의 한 사람이었던 왕찬(王粲)의 후사가 끊기자 그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왕찬의 대를 잇게 되었다. 세 나라가 천하를 두고 다투던 삼국시대 위나라의 수도 낙양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소(何??)가 지은 왕필전에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다는 상투적인 과장이 보이지만 그의 천재성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자의 게으른 수사일 뿐이다. 그는 열 살 때부터 난해하기로 이름난 도덕경을 읽기 시작했고 열여섯 살에 노자주를 내놓았으며 스물세 살로 죽기까지 논어와 주역까지 풀이했다. 자신의 저술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대략의 뜻을 간명하게 요약한 노자지략과 주역약례를 펴내는 친절도 잊지 않았다. 하소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조리가 분명했으며 연회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고 음율을 알았으며 투호를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시대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 그를 미워한 사람이 많았던 까닭은 자주 자신의 뛰어난 점을 내세워 남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기 때문이다.

명문가의 자손에다 타고난 재능을 자부했던 만큼 일찌감치 벼슬에 뜻을 두었다. 이십 세가 되기 전에 관리의 임용을 담당하고 있던 이부랑 배휘(裴徽?)를 찾아가 만났다. 그가 노자를 풀이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배휘는 그에게 성인 공자는 무(無)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데 노자가 무를 자주 이야기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성인은 무를 체득했기 때문에 무를 말할 필요가 없었고 노자는 유(有)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부족한 무를 거듭 이야기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대답이 흡족하지 않았는지 기대한 벼슬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부하(傅??), 하안(何晏) 등 유력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출사의 기회를 얻고자 했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나중에 하안이 그를 황문시랑에 추천했지만 당시의 실권자였던 조상(曹爽)은 황문시랑 자리는 정밀(丁謐)이 추천한 왕려(王黎)에게 주고 그에게는 직급이 낮은 대랑 자리를 주었다. 대랑이 된 뒤에도 그는 조상에게 독대를 청해 만나지만, 조상은 그가 오로지 도에 관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을 보고 사정에 어두운 자로 여겼는지, 얼마 뒤 왕려가 병으로 죽었는데도 그를 등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249년에 사마의가 고평릉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있던 조상을 죽이면서 그 또한 면직되어 집에 머물다가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역사상 가장 탁월한 도덕경 해설

그의 짧은 삶이 함께했던 시대는 찬탈과 변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혼란기였다. 400년을 이어오던 한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질서는 도래하지 않았다.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위나라는 안팎으로 흔들렸다. 밖으로는 촉·오 두 나라와 전쟁 중이었고 안으로는 황제의 권력을 넘보는 군벌들의 발호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위나라는 조비가 첫 황제가 된 220년부터 사마씨에게 나라를 빼앗긴 265년까지 45년 동안 황제가 다섯 번 교체되었고, 왕필이 세상을 떠난 249년에 이미 조씨 일족은 실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어느 모로 보나 그 같은 문사가 살기에 좋은 시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짧은 삶을 살며 남긴 노자주는 수백 년 주석의 역사를 훌쩍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가장 탁월한 도덕경 해설로 손꼽히는 명작이다. 이전까지 양생술과 권모술수에 갇혀 있던 도덕경을 형이상학의 층위로 끌어올려 노자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주역주 또한 한대까지 비합리적 우연과 신비주의에 머물러 있던 상수역학을 뛰어넘어 합리적 사유에 바탕한 의리역학의 신기원을 열어 천 년 넘도록 과거시험 교재로 쓰일 정도로 확고한 권위를 누렸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러한 학문적 성취가 오랜 전통이나 재래의 사유를 부정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창조적으로 결합하고 확장한 결과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는 장자의 만물제동설과 주역의 태극을 응용하여 노자의 뜻을 부연하거나 논어와 맹자의 사례를 들어 주역의 괘와 효를 풀이했는데, 이는 이전까지 전혀 다른 맥락으로 받아들여졌던 이질적인 사유를 창조적으로 통합한 것이다. 그의 철학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잊혀진 사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노자 도덕경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숭본식말(崇本息末)일 뿐이라고 정리했다. 숭본(崇本)은 근본을 숭상하는 것이고 식말(息末)은 말폐를 없애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악함이 일어나는 것은 사악한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윗사람이 진실을 잘 보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음란함이 일어나는 것은 음란한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윗사람이 사치를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둑질을 없애려면 형벌을 엄하게 집행할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욕심을 먼저 없애야 하고, 송사를 그치게 하려면 송사를 잘 판결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얻기 어려운 재물을 숭상하는 지배자의 욕심부터 없애야 한다고 했다. 세상의 문제를 백성 탓으로 돌리는 지배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이다.


다스림의 근본은 무형의 마음을 지닌 백성

만물은 무(無)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고 했다. 귀무론(貴無論)의 탄생이다. 그는 ?도가 하나를 낳는다고 한 노자의 말을 백성의 마음으로 연결하여 풀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물은 하나로 돌아간다. 무엇을 말미암아 하나로 돌아가는가. 무(無)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 무(無)는 만유(萬有)의 근본인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가 말하는 도(道)는 무(無)로서 천하의 주인이 되는 자가 지켜야 할 도리다. 그 도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다. 세상을 다스리는 자에게 그 하나는 백성의 마음이다. 다스림의 근본은 백성이고 백성은 일정하지 않은 무형(無形)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얻은 자가 천하의 주인이 된다.

노자는 이르길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하고, 신은 하나를 얻어 영명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 가득 차고, 만물은 하나를 얻어 자라나고, 왕은 하나를 얻어 천하를 바르게 다스린다고 했는데, 그는 이 하나를 백성의 마음으로 연결하여 새로운 질서는 마땅히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는 노자의 말을 이렇게 풀이했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을 터로 삼고, 귀한 것은 천한 것을 뿌리로 삼으며, 유(有)는 무(無)를 쓰임으로 삼는다. 이것이 되돌아가는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무(無)로 나아가면 만물이 통하여 하나가 된다. 그 때문에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고 한 것이다. 이 또한 백성을 비유한 것이다. 백성은 낮고 천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높은 존재다.

그는 세상의 아름다움에는 모두 뜻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을 얻고 나면 겉모습은 잊어도 된다. 득의망상(得意忘象)이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하고 나면 말은 잊어도 된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를 잡고 나면 물고기 잡는 데 쓴 통발은 잊어도 되고, 토끼를 잡고 나면 토끼 잡는 데 쓴 올가미는 잊어도 되는 것과 같다. 그는 말과 겉모습은 모두 뜻을 전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완전하지도 않다고 보았다. 그런데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은 알맹이인 목적을 잊어버리고 껍데기를 보물로 여겨 소중하게 간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말과 겉모습을 중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뜻을 알기 위해서는 말이나 겉모습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말과 겉모습을 통해 뜻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만 뜻을 완전히 얻기 위해서는 말과 겉모습을 잊어야 한다. 말이 남아 있다면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고 겉모습이 남아 있다면 겉모습 안에 담겨 있는 아름다움을 완전히 체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를 이해하려면 시의 언어 밖에서 뜻을 구해야 하고, 음악의 가락을 이해하려면 악기의 울림 밖에서 소리를 찾아야 하며, 그림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려면 화폭에 그려진 사물 밖에서 참다운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의 득의망상(得意忘象)론은 이후 중국의 예술정신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고 그의 고전해석은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어 사유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