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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이 가져올 일곱 가지 변화
오대수 씨는 블록체인 카지노에서 게임을 할 때 다른 카지노에서보다 더 공평하다고 느낀다. 억울한 수수료를 뜯기지 않아도 되고, 장부를 나눠 갖고 있으니 사기꾼이 발붙이기 힘들 거라고 믿게 됐기 때문이다. 카지노에 대한 신뢰가 생기니 왠지 게임도 더 잘 되는 듯하다. 블록체인 카지노의 원리를 다른 곳에 적용해 보자. 블록체인 도입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1. 공급자와 소비자 직접 거래
블록체인의 가장 큰 장점은 불필요한 중개 과정을 생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블록체인 세상이 되면 그런 과정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게 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중개자들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대표적인 중개기관들이 바로 정부, 지자체, 금융기관(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유통기관(소매상), 법률 서비스(로펌, 공증, 공인중개사), 각종 대행업체 등이다. 규격화된 일을 하면서 수수료를 받는 모든 업종들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농산물을 예로 들어보자. 농산물을 재배하는 농가와 서울의 가정을 직접 연결하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있었다. 농산물을 직판하는 온라인 쇼핑몰도 이미 여러 곳 있다. 문제는 신뢰다. 원산지가 제대로 적힌 게 맞는지, 불량품이 섞여 있지 않은지 등 문제점이 지적될 때마다 소비자들은 다시 대형마트로 발길을 돌리곤 했다. 블록체인이 도입되면 한 번 입력된 농산물 산지와 유통 정보를 변경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신뢰도를 향상시켜 본격적인 산지 직판 시대를 열 것이다.
신뢰가 약한 분야일수록 블록체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카지노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사기꾼이 많은 곳이 중고차 시장이다. 사고내역 조작, 주행기록 조작, 침수차 조작 등 온갖 조작이 판친다. 하지만 블록체인이 도입되면 사고내역 변경이 불가능하기에 중고차 거래에 투명성이 확보된다. 마찬가지로 가짜 의료정보, 가짜 약, 가짜 제품 등 몰라서 당하는 거래들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
홍보 대행사, 광고 대행사, 분양 대행사 등 아예 중개를 목적으로 설립된 업체들의 경우 이들의 업무에 스마트 컨트랙트를 얼마나 도입할 수 있느냐에 따라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기사 한 꼭지가 발행될 때마다 암호화폐를 얼마나 지급할지(홍보), 유저가 광고를 본 횟수당 암호화폐를 얼마나 지급할지(광고) 등을 스마트 컨트랙트로 묶어 놓으면 미들맨이 개입할 여지는 점점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에선 이미 아티스트가 팬들과 직접 소통하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다.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작품 발표 갤러리로 쓰는 음악가, 작가, 웹툰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이 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직접적인 수입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미들맨들의 역할은 사라질 것이다. 아티스트가 자신이 만든 노래, 그림, 영상, 글 등으로 직접 자신의 팬들과 금전적인 거래를 하도록 도와주는 플랫폼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MyCelia, Ujo Music 등의 서비스는 암호화폐로 이런 방식의 직거래를 주선하며 인기를 얻고 있다.
2. 계약과정 간소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만들어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서류 속에서 존재가 증명되는 존재다. 출생신고서, 은행계좌 신청서, 졸업증명서,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결혼신고서, 경력증명서, 부동산 거래 계약서, 등기부등본, 토지대장, 지적재산권 출원서, 연금신청서, 사망신고서 등 각종 공공문서를 작성하며 보내는 시간만 해도 한 사람의 인생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차지할 것이다.
블록체인 세상에선 각종 서류가 사라지거나 간소화된다. 국가 시스템에 블록체인 기술이 도입되면 데이터의 위조나 변조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신원 확인, 거래 확인 등의 절차가 간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2017년 6월 블록체인을 이용한 부동산 등록 시스템을 도입했고, 일본은 농지와 산림 지역까지 포함한 토지대장을 블록체인 원장으로 관리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한국의 국토교통부도 지난해 '부동산거래 전자계약 시스템'을 시범 오픈하며 블록체인 도입 걸음마를 뗐다.
3. 국경 없는 암호화폐
환전이나 해외 송금할 때 어김없이 거쳐야 하는 곳이 은행이다. 은행은 국경에서 길을 막고 수수료를 떼어간다. 똑같은 10달러짜리 지폐도 살 때와 팔 때 가격이 다르다. 이 가격 차이 때문에 기분 나빴던 경험은 다들 한두 번씩은 있을 것이다.
해외 송금 때 자주 이용하는 방식은 웨스턴 유니언이다. 166년의 역사를 가진 이 미국 금융회사를 이용하면 100달러를 송금할 때 수수료를 10달러가량이나 내야 한다. 보내는 국가의 은행과 받는 국가의 은행에서 이중으로 수수료를 떼어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비트코인의 수수료는 0.01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싸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암호화폐에는 국경이 없다. 암호화폐는 국가가 아니라 화폐의 종류로 구분된다. 따라서 만약 암호화폐가 실생활에서 널리 쓰이기만 한다면 전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환전할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은행에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특히 아프리카, 중동, 남미 국가들 중에는 환율이 불안정하거나 은행이 없는 곳이 많고, 은행이 있어도 엄청난 수수료를 떼어가는 경우가 흔한데 이들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암호화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혜택을 제공해줄 것이다.
4. 투명한 기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부한 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대한적십자에서 아이티 피해자를 위해 모은 성금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다거나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의 전 사무총장이 기부금을 개인 용도로 착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면 기부하려는 마음이 싹 달아나기도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계속되고 있는 인도적 대북 지원 논란도 마찬가지다. 과연 그 돈이 실제 북한 주민들이 생필품을 사는 데 쓰이는지 모르기 때문에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블록체인을 이용하면 기부 절차를 투명하게 관리할 수 있다. 내가 기부한 암호화폐가 어딘가로 이동할 때마다 거래 내역이 남기 때문에 나는 그 화폐를 추적함으로써 기부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식량기구는 2017년 5월 요르단의 시리아 난민 1만500명을 대상으로 구호활동을 펼치면서 실물화폐 대신 140만달러 상당의 음식료품 쿠폰을 전달했다. 이 쿠폰은 난민캠프 내에 위치한 슈퍼마켓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음식료품을 사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쿠폰 발행으로 기부 목적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실제로 쿠폰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회계 처리에는 블록체인 방식을 도입했다. 이더리움의 오픈소스를 수정해 개발한 '포크'는 요르단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원조 활동을 펼칠 때도 활용된다.
5. 원아이디로 모든 웹사이트 이용
오랜만에 방문한 웹사이트에서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골치 아팠던 경험 다들 있을 것이다. 또 대부분의 웹사이트에서 자꾸만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강요해 억지로 비밀번호를 생각해내고 또 금세 잊어버린 적도 있을 것이다.
블록체인이 범용화되면 이런 짜증나는 일들로부터 해방이다. 하나의 아이디로 모든 웹사이트 이용이 가능해지기에 웹사이트에 방문할 때마다 내 개인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페이스북 로그인' '네이버 로그인' '카카오 로그인' 등으로 다른 웹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하지만 페이스북, 네이버, 카카오 등 사기업의 서비스는 해당 회사가 망하면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고, 또 개인정보를 거대 사기업의 서버에 보관한다는 것도 부담스럽다(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유난히 많은 한국에서라면 더 그렇다).
이에 비해 '블록체인 로그인'은 암호화된 개인정보가 블록체인에 보관돼 사라질 염려가 없고, 보안 문제는 유저에게 일회용 접근 권한을 부여하는 식으로 해결 가능하다.
현재 금융회사들이 제공하고 있는 공인인증서 없이 앱카드와 지문인증을 이용한 인증 방식은 낮은 단계의 블록체인 로그인 운영 사례다.
스위스는 인구 3만명의 작은 마을 추크(Zug)를 2016년 크립토밸리로 선포하고 모든 시민들에게 블록체인 디지털 아이덴티티를 발급했다. 이더리움 기반으로 구축된 시민들의 디지털 ID는 일종의 디지털 패스포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6. 직접 민주주의 구현
현재 투표 시스템은 사람들이 투표소를 직접 방문해 신분증으로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친 뒤 투표 용지를 발급받아 마킹하고 투표함에 넣은 후 수작업 개표하는 방식이다. 이 모든 과정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관리한다. 하지만 개표 과정에서 내 표가 제대로 집계됐는지 누락됐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블록체인 투표 시스템은 투표와 집계 사이의 절차를 투명하게 해준다. 나의 투표가 집계에 포함됐는지 확인 가능하고, 투표 이력은 영구 보존된다. 이 과정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역할은 사실상 필요 없어진다.
정말로 관리자 없는 투명한 투표 혁명이 가능할까? 한 가지 전제가 있다. 투표부터 개표에 이르는 모든 절차를 블록체인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처럼 종이로 투표하고 손으로 개표하게 되면 오프라인 데이터를 블록체인 시스템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미들맨이 필요해지고 이는 여전히 신뢰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향후 블록체인 투표 시대가 오면 두 가지 변화를 예상해 볼 수 있다. 첫째, 선거의 투명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다. 특히 부정부패가 만연한 정치 후진국에 블록체인 투표가 도입되면 그 파장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아마도 독재국가들은 도입을 꺼려할 것이다). 둘째, 투표 절차가 간소해지고 관리 비용과 시간이 줄어들면서 간접 민주주의가 아닌 직접 민주주의가 확산될 것이다. 많은 국가들이 사안마다 국민투표하는 스위스처럼 되어갈 것이다.
7. 탈중앙화된 기업의 등장
인터넷 시대에는 디지털화에 성공한 기업들이 기존 전통 산업을 장악했다. 아마존, 넷플릭스 등은 공룡처럼 재래식 기업들을 먹어치웠다.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기업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블록체인 시대에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탈중앙화와 권력 분산에 성공하는 기업들만 살아남고 이 과정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기업들은 또다시 도태될 가능성이 크다. '블록체인 혁명'의 저자 돈 탭스콧은 "블록체인 시대엔 임원들의 급여와 그들이 기여한 가치 사이에 막대한 갭이 존재한다면 주주들이 곧바로 알 수 있다"며 "경영자들은 극단적으로 투명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 조직과 전혀 다른, 아예 새로운 형태의 탈중앙화 조직도 탄생할 것이다. 이미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s, 탈중앙화 자율 조직)라는 새로운 조직 형태가 시도되고 있다. DAO에는 CEO나 이사회가 없다. 누구나 익명으로 조직원이 될 수 있고, 조직원들의 다수결 의사결정에 의해 운영되며, 자체 알고리즘이 경영에 관한 판단을 내리고 수익도 분배한다. 2016년 출범한 최초의 DAO인 '더다오(The DAO)'는 보안 유지에 실패하며 몇 달만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DAO는 향후 시행착오를 거치며 진화해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중앙화와 분권화의 경계에 있는 비즈니스의 경우 방향성을 분명히 하기를 요구받을 것이다. 예컨대 공유경제를 구현하고 있는 우버, 에어비앤비 등은 기존 자원을 고루 배분하는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공유경제 데이터를 여전히 중앙 서버에 저장해 관리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들이 중앙서버를 포기하지 않으면 블록체인으로 무장한 새로운 기업의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당장 미국 텍사스 기반의 스타트업 '아케이드 시티(Arcade City)'는 우버와 차별화하며 주목받고 있다. 이 서비스는 블록체인으로 기사와 손님을 직접 연결하고, 중앙에서 요금을 통제하는 대신 기사와 손님이 협의해 운임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페이스북에 대항하는 블록체인 기반의 소셜미디어도 등장했다. 스팀잇(Steemit), 아카샤(Akasha), 시네레오(Synereo) 등은 분산 서버 시스템을 사용한다. 중앙 서버가 없기 때문에 노드가 하나라도 유효하면 영원히 서비스가 중단되지 않는다. '스팀잇'은 글을 올린 뒤 추천을 받은 횟수에 따라 자체적으로 발급하는 암호화폐인 '스팀코인'을 유저에게 보상으로 지급하는데 일주일에 200만 개의 스팀코인을 추천받은 수에 따라 분배한다. 사용자가 글을 쓰면 돈을 벌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이더리움 기반의 '아카샤'는 스팀잇과 정반대로 사람들이 글을 올리거나 수정, 삭제할 때마다 수수료를 걷는데 이 비용으로 플랫폼을 유지한다.
◆세상에 완벽한 기술은 없다
블록체인은 인터넷이 애초 구현하려 했던 네트워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기술이다. 국가, 기업, 이익집단 등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켜 정보와 자본 등에 대한 접근권을 구성원들에게 배분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나눈다. 모든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되며 소수의 이익을 위한 조작은 불가능하다. 기술과 아이디어를 투자한 만큼 생산이 늘어난다는 '수확체증의 법칙'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네트워크에 연결될수록 효용은 더 커진다.
블록체인 세상에선 인터넷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국경의 의미가 사라진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A국가의 나와 B국가의 당신이 서로 신뢰하도록 묶어주는 것이 블록체인이다. "모든 경계에서 꽃이 핀다"는 함민복 시인의 시어처럼 이질적인 세계들이 만나면 그 무수한 '경계들'에서 예전보다 더 많은 꽃이 피어 오를 것이다. 블록체인 참가자들이 활발하게 가치를 창출할수록 이때 창출된 가치는 혁신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기술은 없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의 유명한 경구처럼 "우리는 언제나 '도중'에 있다. 어떤 세상도 완벽하지 않다." 블록체인의 원리가 아무리 그럴듯해도 우리를 유토피아로 데려다 주기엔 여러 한계점들이 눈에 보인다('유토피아'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존재하지 않는(ou) 땅(topia)이라는 뜻이다). 다만 블록체인이 제시하는 방향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지금 세상이 블록체인을 필요로 하고 있을 뿐이다.
블록체인의 근본 취지인 탈중앙화와 분산화는 인간을 더 평등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지만 동시에 기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우려도 공존한다.
인류는 오랫동안 중앙집권화를 역사 발전으로 기록해왔다. 아프리카에서 호모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 여러 대륙으로 흩어졌던 인류는 각 지역에서 세를 규합해 왕국을 세우고 살아왔다. 로마, 이집트, 진나라, 아즈텍 등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국가일수록 오래 지속됐다. 권력 분산을 역사 발전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고작 200여 년밖에 되지 않는데 그동안 수많은 부침이 있었다. 블록체인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려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한국만 해도 그동안 많은 권력분산이 이뤄지긴 했지만 여전히 서울, 대기업, 대통령 등 권력이 중앙에 집중된 국가다. 중앙집중화된 시스템이 갑자기 여러 블록체인 네트워크로 쪼개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사회 전반적으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중앙권력의 공백을 틈타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질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프라이버시 침해다. 블록체인은 '낙장불입'이다. 한 번 기록되면 그 특성상 영원히 삭제할 수 없다.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하지만 영상 데이터가 급증하는 시대에 어쩌면 익명성은 허울뿐인 방어막인지도 모른다. 투명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오히려 인간을 24시간 감시당하게 하는 체제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세상은 한 번 실수하면 영원히 낙인찍혀 죽을 때까지 벌을 받아야 하는 지옥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수시로 터지는 블록체인 주변의 해킹 사건도 문제다. 암호화폐 거래 규모가 웬만한 증시 규모를 능가할 정도로 커지면서 특히 거래소 해킹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마운트곡스(일본, 2014년), 비트스탬프(슬로베니아, 2015년), 비트파이넥스(홍콩, 2016년), 유빗(옛 야피존, 한국, 2017년), 빗썸(한국, 2017년) 등 매년 굵직한 해킹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 거래소는 대부분 사설인데다가 중앙서버형으로 운영되다 보니 보안에 취약하다. 정부는 일단 신규 거래소 설립을 막고 거래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다. 트레저(Trezor), 레저(Ledger) 같은 하드웨어 지갑을 도입하거나 거래소 운영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는 등 기술적인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것이다.
또 지적되는 문제는 블록체인과 기존 시스템의 융합 과정에서 오는 데이터 검증 문제다. 예컨대 농산물 원산지 추적에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면 디지털화된 데이터는 투명하게 관리되겠지만 디지털화되지 않은 정보는 확인할 길이 없다. 데이터상에 기록된 딸기가 실제로 싱싱한지 혹은 썩었는지, 최상위 품종 박스에 그렇지 않은 하나가 섞여 들어 있지 않은지 등은 여전히 눈으로 직접 판별해야 한다. 또 블록체인 기술이 중앙서버에 보관된 데이터를 참조할 때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상청의 날씨 정보 데이터를 공유하는 블록체인을 구성하면, 이때 날씨 데이터는 중앙서버에 보관된 것이기 때문에 데이터 무결성을 보장할 수 없다. 블록체인으로만 구성된 네트워크보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것이다.
◆기술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인간
블록체인은 장점이 많은 기술이지만 만능 해결사는 아니다. 서로 다른 가치체계를 가진 개인들이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를 직접 주고받는다는 이상은 그럴듯하지만 과연 이상대로 실현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을 떠올려 보면 어쩌면 이상과 전혀 다른 현실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스위스, 에스토니아처럼 블록체인을 적극 받아들이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중국, 러시아처럼 문을 닫아걸고 있는 국가도 있다. 미국에서도 델라웨어주(블록체인 기록물 저장소 운영), 네바다주(블록체인 거래 면세 혜택)처럼 적극적인 주가 있는 반면 다른 지역들은 머뭇거리고 있다. 누군가는 용기 있게 뛰어가고, 누군가는 돌다리를 두드리며 간다(한국은 최근 규제 조치 등을 볼 때 팔짱 끼는 대열에 합류한 듯하다).
하지만 실행력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블록체인 기술을 눈여겨보며 그들 나름대로 미래를 대비하고 있다. 대기업, 금융권, 정부 등 잃을 게 많은 집단일수록 유능한 두뇌를 확보하고 블록체인 연구에 더 매진하고 있다.
블록체인이 가져올 세상의 변화가 기대되는가? 혹은 두려운가? 만약 두려움이 더 크다면 스티브 잡스의 이 말을 기억하면 좋겠다. "테크놀로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선하고 똑똑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기술을 아름답게 쓸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듯 변화는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다. 암호화폐 광풍이 가져올 부작용에 혀를 끌끌차기만 하고 있다면 이젠 그 이후의 세상을 머릿속에 그려볼 때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던 오대수 씨도 오늘은 블록체인 카지노를 나와 블록체인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블록체인, 도대체 누구냐 넌?
양유창 기자
※참고자료
돈 탭스콧·알렉스 탭스콧(2016/2017), [블록체인 혁명], 박지훈 옮김, 을유문화사
박영숙·제롬 글렌(2016), [유엔미래보고서 2050], 이영래 옮김, 교보문고
오세현·김종승(2017), [블록체인노믹스], 한국경제신문
윌리암 무가야(2016/2017), [비즈니스 블록체인], 박지훈·류희원 옮김, 한빛미디어
표철민(2017), "중개인 없는 직접 거래, 블록체인이 인터넷의 미래다", MediaX
Christopher Cannucciari(2016), "Banking on Bitcoin in Open-Source We Trust", Netflix
[출처 : http://premium.mk.co.kr/view.php?no=2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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