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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III/Thinking

사람과 범고래는 왜 중년에 폐경을 할까?

진화생물학이 못 푼 60년 수수께끼


침팬지는 죽기 전까지 출산하는데 인간과 고래 3종은 폐경 뒤 오래 살아 1957년 ‘어머니 가설' 이후 논란 지속


미국과 캐나다 쪽 태평양에 서식하는 범고래 무리. 연어를 잡아먹는 이 범고래는 일찍 폐경한 나이 든 암컷이 무리를 이끈다.



자연계 최고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가 폐경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남기는 쪽으로 적응하는 것은 생물 진화의 철칙이다. 자손을 남길 능력이 충분한데도 번식을 포기한다는 건 ‘유전적 죽음’을 뜻하고, 애초 그런 유전자가 살아남을 리 없다. 그렇다면 왜 사람을 비롯한 몇몇 동물은 중년에 폐경을 한 뒤 장기간 생존할까. 지난 60년 동안 진화생물학 최대의 논란거리다.




어떤 동물이 폐경을 할까


인도의 람지트 라그하브(102)는 94살과 96살에 자식을 얻어 ‘가장 나이 많은 아빠’로 꼽힌다. 남성은 늙어서도 정자를 생산하지만, 여성은 50∼51살이면 난소 기능이 쇠퇴해 월경이 중지되는 폐경이 나타난다. 산업화와 현대 의료 혜택을 입지 않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 여성도 현대인과 비슷한 폐경을 거치고 수십 년을 더 산다.


영장류는 사람과 유전적으로 가장 비슷한 동물이지만 폐경은 하지 않는다. 야생에서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오랑우탄은 30대말에 마지막 출산을 하고 곧 죽는다. 사람이 45살 이전에 출산을 마치고 약 20년 더 사는 것과 딴판이다. 야생 영장류학자인 김산하 박사(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는 27일 “침팬지가 인간보다 수명은 짧지만, 마지막 자식을 낳는 시기는 비슷하다. 수명 차이를 고려하면 침팬지는 아주 늙어서까지 새끼를 낳는 셈이고, 인간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데도 갑자기 중단하는 특별한 행태를 보인다”라고 말했다.


영장류와 인간의 마지막 출산과 사망 나이 대비. 영장류는 두 시기가 대개 일치하지만, 사람만 딴판이다. 수전 앨버츠 외(2013)

영장류와 달리 고래 가운데 범고래, 들쇠고래, 흑범고래 등 3종이 폐경 이후 오래 사는 것으로 밝혀졌다. 범고래는 12∼40살 동안 번식하지만 수명은 90살이 넘는다. 폐경 이후의 삶이 수명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60살 넘게 사는 들쇠고래도 35살이면 번식을 멈춘다. 북극고래가 100살 이상 살지만 죽기 직전까지 새끼를 낳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프리카코끼리와 아시아코끼리도 각각 수명인 60대와 70대까지 출산을 이어간다.


김현우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 박사는 “범고래, 들쇠고래, 흑범고래는 모두 대양에 사는 대형 돌고래로 고도의 사회적 행동을 하는 공통점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새끼를 적게 낳고 오래 기르며 안정된 모계 집단 속에서 어미와 자식의 유대가 굳건하다.


흑범고래의 폐경은 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들은 남아공에 좌초하거나 일본이 포경한 흑범고래를 통계적·형태학적으로 분석해 이런 결론을 얻었다. 과학저널 ‘동물학 최전선’에 실린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흑범고래의 폐경 후 수명이 범고래나 들쇠고래보다는 아시아코끼리와 비슷했다”며 향고래, 큰머리돌고래, 들고양이고래 등 다른 대형 사회적 돌고래에도 폐경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들쇠고래가 무리를 지어 헤엄치고 있다. 폐경을 하는 고래는 사회성이 높은 종이다.


식물에 벌레혹을 형성하는 일본의 진딧물 한 종도 폐경을 한다는 사실이 2010년 일본 연구자에 의해 밝혀졌다. 이 사회성 진딧물은 번식기를 마친 뒤 새끼를 보호하는 ‘제2의 삶’을 산다. 생식기관이 점액 분비기관으로 바뀐 이 늙은 진딧물은 새끼가 든 벌레혹을 지키다 포식자가 오면 왁스질 분비물로 자신과 포식자를 함께 굳혀 죽이는 행동을 한다.



왜 생식 능력을 포기하나


폐경이 출현한 이유는 대개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의 번식능력을 포기하는 대신 자식이나 손주를 도와 결과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이득을 얻는다. 1957년 나온 ‘어머니 가설’과 1998년 나온 ‘할머니 가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어머니 가설’은 자신의 생식을 중단하더라도 자식에 투자하면 노산의 위험을 피하는 등 결과적으로 적응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의료 혜택이 없는 수렵채취인도 출산 때 산모 사망률이 3% 미만으로 나타나 노산의 위험이 과장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유타대의 인류학자 크리스틴 호크스는 아프리카 하드자인을 연구해, 나이 든 여성은 출산을 포기하고 젖을 뗀 손주를 돕는 편이 진화적으로 득이라는 ‘할머니 가설’을 내놨다. 인간의 아이는 젖을 뗀 뒤에도 오랫동안 돌봐야 한다. 잇따라 출산을 하는 젊은 여성보다 나이 든 여성의 경험과 힘이 뿌리 식량을 채집하는 등 중요한 구실을 한다.


자신의 생식 기회를 버리고 자식과 손주 지원에 나서는 진화적 이점은 동물 연구에서도 밝혀졌다. 영국 엑시터대 진화생물학자 대런 크로프트 등은 2012년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실은 논문에서 36년 동안 북서태평양 범고래를 조사한 데이터를 분석했다.


놀랍게도 범고래의 어머니가 죽으면 30살 아들이 이듬해 죽을 확률은 14배로 뛰었다. 범고래 수컷은 커서도 ‘마마보이’였다. 할머니 범고래는 무리를 이끌며 먹이 찾기, 포식자 감지, 문제 해결, 이동, 집단 내 갈등 해소 등에 기여한다.



‘어머니 가설’과 ‘할머니 가설’
“늙어서 힘들여 번식하는 것보다 자식, 손주 양육 돕는 게 이득”
‘생식 갈등 가설’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의 갈들이 나이 든 세대의 생식 포기로 이어져”


범고래는 어미와 새끼의 유대가 강하고 어미의 존재가 새끼의 생존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데이비드 엘리프리트, 고래연구센터 제공


가장 최근의 학설은 ‘생식 갈등 가설’이다. 2008년 영국 엑시터대 진화생물학자 마이클 칸트 등은 생식을 둘러싼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의 갈등이 나이 든 세대의 생식 포기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할머니 가설은 자신의 유전자의 절반을 남기는 직접 출산에 견줘 4분의 1을 남기는 손주 지원의 이득이 충분치 않다는 이론적 약점이 있었다. 43년 동안 범고래를 장기조사한 연구에서 어미와 딸이 동시에 번식에 나서면 어미의 자식이 사망할 위험성이 딸의 자식보다 1.7배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인간도 딸이 출산을 시작할 즈음 어머니의 출산이 멎는다. 생식 갈등 가설은 할머니 가설을 보완하는 이론으로 주목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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