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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무계원

한옥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분해가 조립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기둥과 서까래에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끼우는 방식을 쓰기 때문이다. 그런 한옥의 특징 때문에 처음 만들어진 자리와 다른 곳에 위치한 전통 건축물들이 몇 개 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에 있는 양이재는 원래 덕수궁이 경운궁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궁 안에 있던 것이고, 경희궁의 흥화문은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32년, 일본 사찰인 박문사로 옮겨졌다가 1994년에 와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무계원 역시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하문을 넘어 부암동 주민센터 뒤편의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다보면 오른쪽에 무계원이 나온다. 담장이 야트막하건 아예 없어서 지나가는 누구나 환영한다는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조용해 보이지만 무계암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무게는 만만치 않다. 무계원의 이름은 바로 무계정사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건물들이 잔뜩 차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당연히 텅 비어 있으니 무계원 즈음이면 인왕산과 자하문이 한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예술을 사랑하는 안평대군의 사저인 무계정사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 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선비와 예술가들과 교류를 했다고 전해진다.


무계원의 한옥들은 오진암의 것을 가져와서 다시 재조립한 것이다. 1910년 지어진 오진암은 전형적인 근대 도시한옥의 모습을 가지고 있던 곳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낸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70년대에는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요정으로 손꼽히기도 했던 곳이다. 2010년 관광호텔 신축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울시와 종로구청에서 협의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서 옮기도록 한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된 무계원은 주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이자 인문학 세미나와 강연, 전시회 등이 열리기도 한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공간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뒷마당이었다.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지켜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마다 답은 ‘사람’에게 있다고 대답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역사라고 해도 그 안에 사람이 없다면 삭막한 과거일 따름이다. 무계원은 역사를 무겁지도 그렇다고 마냥 가볍게 보지도 않는 따뜻한 공간이라고 느껴진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매주 월요일(발행일 기준) ‘서울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정명섭 소설가가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거나, 스쳐 지나치기 쉬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명섭은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며 역사소설과 인문서 등을 쓰고 있으며, <일제의 흔적을 걷다>라는 답사 관련 인문서를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출처 : http://mediahub.seoul.go.kr/archives/1197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