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
봉건제도가 어떤 사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세기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법률 용어였던 봉건제도를 문명의 상태를 나타내는데 쓰기 시작한 것은 불랭빌리에(Boulainvilliers)백작의 <고등법원에 관한 사적 서한>이고 이를 널리 퍼트린 사람은 몽테스키외로 봉건제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그 개념이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고대 문명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여 라인강을 그 경계로 북쪽에는 만족(barbares)의 땅이 펼쳐져 있었는데 중세 초입에 두 거대한 움직임이 생김으로써 이 균형이 깨졌다. 그 하나는 게르만의 침입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교도의 정복운동이었다. 유럽의 동쪽 끝에는 슬라브 어족에 속하는 집단들이 별개의 발전 경로를 따르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3대 세력권에 둘러싸인 서부 유럽과 중부 유럽을 단순히 유럽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중요한 것은 낡은 지리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 가치의 의미에서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유럽의 문명이 싹트고 꽃피웠단 말인가. 이슬람교도들에게 승리한 카를 마르텔(Karl Martel) 휘하의 프랑크인들을 유럽인들이라고 부른 8세기의 에스파냐 연대기 작가, 오토대제를 유럽의 해방자라고 찬미했던 작센의 수도사 비두킨트(Widukind)가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듯이 봉건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유럽은 존재하고 있었다.
봉건사회 1권 인적 종속 관계의 형성
1부 환경
1책 유럽에 대한 마지막 침공
1장 이슬람 교도들과 헝가리인들
당신들은 바로 눈앞에서 주님의 진노가 폭발함을 본다.(중략) 인기척 없는 시가지, 철저히 파괴되거나 잿더미가 된 수도원 그리고 황폐해진 들판, 이것들 외엔 아무것도 없다.(중략) 곳곳에서 강자는 약자를 압박하고,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서로 잡아먹는 바다 고기를 방불케 한다.
9세기와 10세기의 문헌, 증서, 종교회의의 의사록들은 설교자들의 비관주의적인 태도와 과장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수많은 사실들로 뒷받침되는 만큼 이 속에서 표현된 사태가 범상치 않았음에는 틀림없다. 봉건제는 이런 극도의 혼란 속에서 발행했다. 아니, 혼란 자체에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데에는 유럽사회 외적인 요소도 상당부분 작용하였다. 북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남쪽에서는 이슬람 교도들이, 동쪽에서는 헝가리인들이 침입해왔던 것이다.
열거한 세력 중 이슬람의 위협은 가장 덜했다. 8, 9세기에 칼리프 제국이 조각난 이후 분열된 국가들은 여전히 강력했으나 침입보다는 국경 분쟁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갔다. 두 문명의 충돌은 두 전선에서 일어났는데 하나는 남부 이탈리아이다. 아글라브 왕조는 그리스인들에게서 시칠리아를 902년에 완전히 빼았고 오랫동안 이탈리아를 약탈하며 위협했다. 오토 2세는 982년 남부 이탈리아 정복을 착수하나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며 11세기 노르만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또 다른 충돌은 에스파냐에서였다. 이곳의 이슬람 교도들은 10세기 초에도 침략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칼리프들의 본거지가 너무 멀었으므로 군소 기독교 왕국들은 서서히 영토를 잠식해가기 시작했다.
이곳의 분쟁은 국경 분쟁과 더불어 극심한 약탈을 동반했다. 사라센인들은 지중해 해상 뿐 아니라 해안 전역을 휩쓸고 다녔다. 842년에는 이미 론(Rhone)강을 거슬러 올라가 아를(Arles) 부근까지 올라갔고 890년 경에는 생 트로페(Saint Tropez) 부근의 프레네(Freinet)에 둥지를 틀고 주변의 무방비 도시와 수도원을 약탈하기도 했다. 940년 아랍인 게릴라들은 라인강 상류와 발레(Valais)에까지 출몰하여 생 모리스 다곤(Saint-Maurice d'Agaune) 수도원을 불태웠다. 이들이 972년 클뤼니 수도원장 마이욀(Maieul)을 납치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로방스 백작 기욤이 모집한 군대에 결국 이들의 성채가 함락되었다. 하지만 해안 지역은 여전히 극심한 약탈에 노출되었다.
헝가리인들 또는 마자르인들은 불쑥 나타났다. 중국의 기록에 의해 그 자취가 남은 훈족과 달리 이들에 대한 중세 이전의 기록은 없다. 헝가리인들의 일부가 페체네그인의 시달림으로 이동하였는데 일부가 티소(Tisza)강과 도나우강 중류지역에 도달했다. 이들은 906년 슬라브 인들의 첫 국가라 할 만한 모라비아 공국을 멸망시킴과 동시에 헝가리 평야에 정착하였다. 이때쯤부터 주변을 약탈하여 이탈리아, 게르마니아, 갈리아 등의 수도원 연대기에는 거의 매해 이지방 저지방에서 일어나는 헝가리인들의 약탈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북부 이탈리아, 슈바벤, 바이에른 지방의 피해가 극심했다. 북서쪽의 작센, 이탈리아의 오트란토, 더 서쪽으로 부르고뉴 지방과 루아르 강을 지나 알프스를 넘기도 하였다. 헝가리인들도 사라센인들과 마찬가지로 요새화된 도시는 좀처럼 공격하지 않았는데 그런 시도는 파비아를 제외하고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955년 8월10일 오토 대제는 레히(Lech)강 기슭에서 헝가리인 무리를 요격하여 그뒤로는 바이에른 지방 변경의 국경분쟁 정도로 축소되었다. 얼마 안있어 오토 대제는 알프스 산중의 무르(Mur)강 유역과 엔스강 유역에 하나씩의 변경백령을 설치했는데 후자는 동부군관구라는 뜻의 오스타리히(Ostarrichi)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오스트리아의 모체가 된다. 레히강 유역의 전투가 빛나는 전과이기는 하나 헝가리의 약탈이 멈춘 것은 약탈의 비효율성과 함께 귀족층에서 시작된 유럽문화로의 편입을 동반한 결과였다. 약탈은 그 여정의 험난함과 손실, 약탈물 운반의 어려움으로 인해 굉장히 비효율적이었다. 노예들은 도망치기 쉬웠으며 도시와 제후들이 약탈에 대비하기 시작하였고 질병으로 헝가리인 무리가 전멸하는 일이 발생하기까지 하였다. 농경이 완전히 정착되고 헝가리 왕의 주도로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헝가리와 주변 지역의 분쟁은 왕들의 국경분쟁 정도로 그치게 된다.
2장 노르만인들
북쪽의 스칸디나비아인은 데인인, 예타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의 해안과 골짜기에 걸쳐 거주하던 다양한 토착민들의 집단으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이들은 대체로 비슷한 특성들을 보여주었고 대륙에서는 북쪽 사람이라는 뜻의 노르트만(Nordman), 영국에서는 그들이 많이 접촉했던 데인인들의 이름을 따서 데인인으로 통칭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항해에 매우 능숙하여 해안과 수로를 따라, 필요할 때는 배를 육로로 운반하면서 800년 경부터 갑자기 출현하였다. 말을 이용하면서부터 더욱 빠르게 움직이게 되었고 점점 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성벽을 공략할 줄도 알았고 침략을 하지 않는 대가로 수도원이나 왕으로부터 돈을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금은을 북유럽으로 가져갔는데 일부는 아직까지 박물관에 남아있기도 하다. 이들은 포로의 몸값을 받아내고 노예로 팔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금전과 관계없이 잔혹한 학살을 즐기기도 했다.
처음에는 계절에 따라 공격하는 형태를 띄었으나 영불해협이 방비되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844년에는 에스파냐, 859년과 860년에는 지중해에까지 내습하였는데 지중해로의 모험이 단발성에 그쳤던 것은 이슬람 함대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모험이 점점 장거리화 되자 매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지며 약탈지에서 겨울을 나기 시작했다. 고향을 떠나 모험을 하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이런 형태로 정주하기 시작했다.
851년 잉글랜드에서 월동하면서부터 정복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웨식스를 제외하고 잉글랜드의 국가들은 멸망하거나 일종의 보호령 상태에 놓이게 된다. 웨식스는 곧 실지회복에 착수하여 954년, 적이 점령하던 모든 지역에서의 최고 지배권을 인정받기에 이르렀으나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정주지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이들 두령(iarl)들은 앵글로색슨의 왕 아래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10세기 말, 덴마크와 스웨덴의 왕권이 강력해지긴 하였으나 이들의 모험심이 사그라든 것은 아니어서 980년부터 대 브리튼 침공이 격화됐다. 1042년 잉글랜드는 웨식스가의 에드워드를 마침내 왕으로 받아들여 데인인의 영향에서 벗어났으나 해안의 침략이 멈추지는 않아 잉글랜드의 힘은 계속 약화되었다. 이를 노린 두 군대, 곧 노르웨이 왕 하랄(Harold 또는 Harald)이 이끄는 군대와 노르망디의 서자공 기욤(정복왕 윌리엄)이 이끄는 군대가 상륙하는데 헤이스팅스에서 하랄이 기욤에게 패배한다. 이후 데인인들은 정복보다는 해안 약탈에 주력한다.
정복왕 윌리엄처럼 바다의 왕이 뭍의 군주가 된 예는 대륙에서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덴마크에서 쫓겨난 두 왕족이 경건왕 루트비히로부터 두르스테드 일대의 은대지를 받았다. 분명 10세기 초에는 정주의 관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의 약탈이 항상 충분한 결과물을 안겨주었던 것은 아니고 때에 따라 패배를 맛보았으며 또한 국왕들도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는 힘에 부쳤기에 샤를 단순왕은 이전에 자신의 대자가 지휘했던 노르만인들의 새로운 우두머리 롤로에게 백작위를 수여하여 국경을 수비하도록 했다. 하지만 토지를 받지 못한 노르만인들의 침입이 이어졌고 토지를 받은 영주들 역시 약탈의 습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북유럽은 점점 기독교화되고 있었다. 이 지역이 완전히 기독교화되는데는 3세기나 걸렸던 만큼, 이교의 저항이 약했다고 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이들은 조직적이지 못했고 민족의 이동이나 국가 형성 같은 사회구조의 변화가 이교 성직자들의 위신에 타격을 가해 스스로 해체될 조짐까지 보였다. 문헌에는 진짜 무신론자가 종종 등장한다. 더군다나 다신교 자체가 다른 종교의 접근을 용이하게 해 주었다. 여기저기 약탈하며 기독교를 접하고는 세례를 받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이들이 처음에 기독교를 접했을 때 자기들 신의 도움으로 물리칠 수는 있으나 두렵고 위험한 존재로 파악했다.
교회의 선교단도 일찍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루트비히 경건왕의 주도로 선교사들이 데인인과 스웨덴인들이 사는 곳으로 갔다. 함부르크에 대주교구가 설치되면서 이곳을 거점으로 잉글랜드와 더불어 북유럽의 기독교화에 힘쓰는데 스칸디나비아와 잉글랜드와의 친숙성-스칸디나비아의 잉글랜드 침공-으로 인해 선교 경쟁에 잉글랜드가 우위를 점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모험을 사랑하고 칼이 부딪히는 쇳소리에 열광하기는 하였으나 이것만으로 이들의 험난한 약탈과 침략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서유럽의 방비가 허술했기에 이를 틈타 침략했다는 설명 또한 그들의 침략 시기를 보면 납득할 수 없다. 이들은 9세기 즈음하여 항해술에 커다란 진보를 이룬다. 하지만 이는 침략의 원인이 아니라 침략을 의도한 결과물로 봐야한다.
2-4세기에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스칸디나비아에는 거대한 무인지대가 생겼다. 8세기에 이르러 인구과잉으로 토지 부족에 시달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불안을 느낀 수장들은 주변을 약탈하여 전리품으로 생활을 유지했으나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이주야말로 생활고를 해결할 기회였다.
또한 근친복수라는 그들의 습속으로 볼 때, 인구밀도가 높아져 통제가 용이해지자 복수의 대상자들은 숨을 곳이 점점 사라져갔다. 이런 관습과 모험의 성공에서 영향을 받아, 취향에 따른 이주 현상도 급속도로 나타났다. 왕권 강화가 이루어지던 시점에 수많은 추방자와 왕위쟁탈전에서 실패한 자들이 바다로 쏟아져 나왔으나 그로인해 이주민의 원천이 고갈되었다. 왕들도 산발적인 원정을 거의 장려하지 않았다. 이는 범죄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수장들도 정주에 익숙해지자 원정보다는 주변의 경쟁자들을 물리침으로 야심을 채우려고 하였다.
3장 침입의 몇 가지 결과와 교훈
서유럽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많은 도시와 농촌이 약탈 뿐 아니라 안전한 지역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로 피폐해졌다. 하천의 수로를 따라 이루어지던 교역은 극도로 위험해졌다. 이런 황폐화는 성채 속의 약탈자들을 굶주리게 하기 위해 토벌군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수도원에까지 영향을 미쳐 교회 문화 또한 종말을 고했다. 이러한 인구의 이동과 정치문화적 변동으로 잉글랜드에서는 노섬브리아와 머시아가 무너지며 웨식스의 통일왕국이 출현했다.
사라센 약탈자들도 헝가리 유랑자들도 기존 유럽인들과 뚜렷하게 섞이지는 않았으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좀 다르다. 센 강 유역 노르만인 사이에서는 940년 경부터 더 이상 북구어가 통용되지 않아 노르망디의 로망스어는 일반 프랑스어와의 관계에서 해상과 관련된 전문용어들만이 살아남았다. 잉글랜드에서는 고대 영어와의 유사점으로 인하여 많은 명사, 형용사, 동사, 일부 대명사들이 살아남았다. 이는 침입자들의 대규모 토지점유가 나타나면서 생활상의 하찭은 물건이나 인명, 정복자들의 계급에 편입하려는 계층의 작명, 스칸디나비아인들이 건설한 마을의 명칭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바다 건너에서 온 사람들이 재판권을 가지면서 법률에서도 차용어의 흔적이 남았다. 또한 이들의 법은 웨식스가 승리한 이후에도 데인로(Danelaw)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농촌사회에서도 토지 단위가 dale, ploughland 등으로 변경되는 등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농촌에서는 자유민이 많았고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침입자들은 스스로 토지를 가꾸어 나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정복왕 윌리엄의 예를 들어 이들 역시 수장으로 이루어진 계층이 주로 이주해왔을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하지 않다.
이들의 이주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따랐는데 때로는 부족에 따라서 일괄적으로, 때로는 타부족에 섞여들어 이주해갔으나 분파별로 뚜렷한 대조를 보이며 서로 정복 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사라센이나 헝가리의 약탈부대 규모가 큰 것이 아니었음에도 해안을 유린하고 마을을 불태운 것은 항해술의 부재가 하나의 이유이다. 낮은 인구밀도 또한 치안을 유지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침입자들이 항상 더 훌륭한 전사였던 것은 아니다. 이런 차이는 사회제도상의 차이에서 나타나며 침입자들도 정주하게 되자 스스로의 문제에 골몰하며 약탈을 그치게 된다. 하지만 서유럽이 그토록 큰 피해를 입었던 또 다른 하나는 위험에 맞서기보다는 피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이 맞서 싸우자 침입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2책 생활 조건과 정신적 분위기
1장 물질적 조건과 경제적 기조
봉건시대는 11세기 중엽, 이민족의 침입 중단과 함께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며 사회 전반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방향의 변화로, 두 특성을 가진 연속적인 시대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봉건 1기에는 인구밀도가 매우 낮았다. 지역적 편차가 심하여 플랑드르나 롬바르디아는 비교적 형편이 좋은 지역에 속했으나 어떤 곳은 로마가 지배했던 시대보다도 인구가 줄어들었다. 대도시의 인구도 수천이 고작이었다. 농민들은 주로 촌락을 이루었고 미개지에는 숯 굽는 사람, 양치기, 추방자 정도가 살 뿐이었다.
이렇게 흩어져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교류도 어려웠다. 특히 카롤링거 제국이 무너지며 공공사업이 모두 중지되어 로마 시대의 도로나 교량이 방치되고 망가졌다. 도로에는 온갖 산적떼가 들끓어 위험했으며 육로를 통한 이동 속도 역시 느렸다. 이런 상황에서 받을 물건이 있는 사람은 직접 이동하여 수령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봉건 1기에 왕들이 문자 그대로 여행의 과로로 죽어간 이유는 수령 물자를 현지에서 직접 소비하기 위함이었다. 학문과 수도를 원하는 성직자들 역시 베네딕토회의 방랑에 대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온 유럽을 떠돌아다니며 배우고 그들의 사상을 퍼뜨렸다.
이 시기의 장거리 여행에는 많은 준비를 해야 했으므로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이웃 취락에의 도보여행 같은 단거리 여행은 주저하는 경향이 짙었다. 따라서 중세의 보편성과 분파주의적인 이중성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정기적인 우편활동은 베네치아-콘스탄티노플간의 연락망이 유일하며 거의 모든 계층이 다른 지역과 연락하기 위해서는 나그네의 친절에 기대어야 했다. 따라서 정보에 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타지역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무역은 이베리아 반도, 동유럽을 통과하는 육로와 아드리아해를 통과하는 해상을 통해 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수출할만한 물품이 없었기에 서유럽의 부는 계속 유출되었고 통화부족을 야기했다. 서유럽이 다소 폐쇄적이고 자족적이긴 하였으나 아랍의 주화를 본따거나 스스로 주조한 솔리두스화, 데나리우스화, 리브라화가 통용되었고 농민들도 공납을 위하여 화폐를 구입하였다. 하지만 화폐의 통용이 불규칙적이어서 보다 실용적인 금은접시, 십자가 등의 형상으로 저장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봉급제가 정착되지 못하고 솔거부양과 봉토가 생겨나게 되는데 교역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피고용자를 충분히 부양할 수 없게 되어 솔거부양제 보다는 수여자와 봉사자 사이의 느슨한 관계가 유지될 수 밖에 없는 봉건경제가 정착하였다.
봉건 2기에 인구밀도가 높아지며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났다. 도로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으나 수많은 교량이 정비되고 마구 사용법이 개량되어 수레의 효율이 크게 높아졌다. 동방과의 관계에서는 많은 양의 직물을 수출하기 시작하며 화폐가 유럽으로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는 경작지가 개간되고 훨씬 많은 양의 작물을 수확함으로써 가능한 현상이다. 화폐의 유입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상공업 종사자, 특히 상인의 지위가 높아지며 이후 유럽의 정세는 상권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또한 통화량의 증가와 함께 봉급제가 서서히 실시되던 시기였다. 2장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
이 시대의 사람들은 열악한 위생조건, 영양부족, 질병 등으로 영아 사망률이 대단히 높았고 또한 노년기도 빨리왔다. 이는 환각을 촉진하였고 수도사들로 하여금 초현실적인 현상, 특히 꿈에 대단히 몰두하게 하였다. 또한 주변과 내부의 예측 불가능한 힘에 지배당하던 이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였다. 부활절 등의 전례 날짜를 산출하기 위해 사건을 꾸준히 기록하던 성직자들조차 날짜나 하루의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하여 불분명하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에 대한 모호함 뿐 아니라 이 세계 전체가 숫자와 관련된 모든 것에서 정확성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한편 이 시대에는 라틴어와 일상어의 두 종류 언어가 존재했다. 라틴어는 공문서나 상류층의 언어로써, 일상어는 평민들끼리 또는 상류층이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나 사용되었다. 영국에서 한 때 영어가 법률 언어로까지 발전하였으나 노르만의 침략 이후 라틴어로 대체되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고 라틴어에 적용시키며 의미가 불분명한, 또는 왜곡된 용어가 사용되었고 몇 가지 언어를 동시에 사용함에 따른 라틴어 표현상의 어리숙함이 만연하였다.
사회의 이런 이중적 언어구조는 교양인의 테두리를 대폭 축소시켰다. 세속 사제들조차 라틴어를 읽고 쓸 줄 모르는 자가 속출하였고 일부 귀족층이 교육을 중시하기는 하였으나 라틴어를 모르는 귀족층이 매우 많았다. 따라서 문서를 대필하는 자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문서 작성 형식에 전례를 따르거나 필요이상으로 수사구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 의미가 왜곡되어 작성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을 ‘심신 깊은 사람들’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서유럽적인 신학과 종말론에 대한 의미이다. 논리적인 철학은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제외하고 11세기 이전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여 신앙이 가장 순수하게 작용하던 시기이다. 지도 계급은 그들이 세속적인 지도뿐 아니라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으므로 형제들 전체가 수도사가 되어 가계가 끊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성직자들은 종말에 대해 늘상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올해가 종말의 마지막 해라고 설교하더라도 일 년의 시작과 끝을 정확히 몰랐으므로 갑작스런 사회 전체의 혼란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혼란의 갑작스런 끝도 없었다. 종말에 대한 공포는 전쟁, 폭풍우, 기아, 전염병 등의 재난이 있을 때마다 지방에서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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