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쯤 전, 십팔기라는 무예의 전수자이자 체육과 박사과정생이었던 친구와 품앗이를 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내게 한문을 배우고, 필자는 그 친구에게 무술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와 동문수학한 승려가 찾아와 같이 운동을 했다. 그 친구와 승려는 함께 식사할 것을 청했고, 필자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필자는 곧 그 상황이 다소 곤혹스러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보다 이전 공부 모임에서 알고 지내던 비구니와의 기억 때문이었다. 함께 식사를 해야 할 때면 어디에 가야 할 지부터가 고민이었다. 일행들은 무엇을 먹여야 할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없었다. 간신히 식당을 골라 들어가면, 그는 식당에 가면 “비빔밥에 계란하고 고기 빼고 주세요”, “된장찌개에 바지락이나 조개는 넣지 말아 주세요”와 같은 요구를 하곤 했다. 그도 힘들었겠지만, 나머지 일행들도 편치 않기는 매일반이었다.
생각 없이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해 놓고 잠시 동안 혼자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그 승려가 “우리 삼겹살이나 먹으러 가지요”라고 활기차게 말했다. 다소 놀라웠지만, 일단 내 고민은 쉽사리 해결된 셈이었다. 그런데 삼겹살집에 가서도 상황은 쉽지 않았다. 까까머리에 승복을 입은 사람이 포함된 일행이 삼겹살집에 들어갔으니, 그곳을 가득 채운 손님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당황하던 나와는 달리, 그 승려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리에 앉아서는 “아주머니, 여기 삼겹살 3인분하고 소주 두 병 주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순간 당황하였지만, 그의 당당한 태도에 사람들은 이내 우리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필자는 그런 태도야말로 정말로 불교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불교는 해탈을 목표로 한다. 해탈(解脫)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풀어내고 벗음’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이 집착에서 생긴다고 한다. 욕망에 대한 집착, 삶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집착을 벗어버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곧 극락이다. 깨달은 자란 자유를 얻은 자인 것이다.
해탈, 즉 완전한 자유를 목표로 하는 사람이 무언가에 집착한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조사(선불교의 큰 스승)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경전을 불태운 고승도 있다. 진정한 자유는 스승이나 경전, 나아가 부처에 대한 집착에서까지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고승들의 기행은 그냥 미친 짓으로 보일 뿐이다. 선불교의 조사는 오직 이전의 조사만이 정하게 되어 있다.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는 깨달은 자만이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승 하나가 제자들의 깨달음을 시험하던 중, 한 제자가 갑자기 스승의 따귀를 때렸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하였다. 그야말로 스승의 가르침뿐 아니라 스승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또 한 고승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스승에게 버럭 소리를 질러 깨달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것을 지켜 본 다른 제자가 스승에게 더 크게 소리를 지르자, 스승은 “어디 스승에게 소리를 질러?”라고 꾸짖으면서 그 제자를 마구 때렸다. 두 번째 소리를 지른 사람은 첫 번째와는 다르다. 그는 이미 소리를 지르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선불교의 고승 한 분을 모시고 기생이 나오는 집에서 손님과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고승은 놀랍게도 옆 자리에 앉은 기생의 몸을 더듬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기까지 하였다. 그 사람은 너무나 놀랍고 무안했지만, 차마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 못하다가, 자리가 파하고 집에 가는 길에서 고승에게 그래도 되는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 고승은 “자네는 그 처자를 여기까지 업고 왔구먼. 나는 술집에 내려놓고 왔다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과거 한 벤처기업의 사장이 사원들에게 자율성과 창의력을 고양시키기 위해 정장 복장에서 자유 복장으로의 전환을 지시했다. 그런데 자유 복장이 시행되는 첫날, 한 사원이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자, 사장은 그 사원을 몹시 나무랐다고 한다. 그 사장의 태도는 어떠한가? 사장은 ‘자유 복장’이라는 말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정장을 입는 것은 자유 복장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는 정장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과 자유의 경지인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자가 무언가에 대해 “반드시 ~해야만 해”라거나 “절대로 ~해서는 안 돼”라는 태도를 견지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자유의 경지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자 또한 “나는 절대적으로 해야 한다거나 절대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했으니, 성인들의 경지는 일맥상통하는가 보다. 삼겹살에 소주 두 병을 시킨 승려의 태도에서 필자가 진정으로 불교적인 정신을 느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 붓다의 죽음과 관련해서 강력한 설 중의 하나는 그가 상한 돼지고기를 먹고 배탈이 나서 죽었다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에 집착하는 불교도들이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화를 내겠지만, 정황상 그 가설은 매우 강력하다. 최소한 초기의 불교 수행자 집단에서 육식을 금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불교 수행자들은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 탁발을 했다. 사람들에게 얻어먹는 대신, 자신이 수행을 통해 쌓은 덕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런 탁발 수행자가 “저기요, 고기는 좀 빼고 주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의 수제자 중 하나는 가난한 노파에게 하수도 물을 얻어먹기도 하였다. 부처가 상한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아니, 부처는 아마도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으리라. 그런 소소한 것에 구애받는다면 진정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란 아무 것에도 구애받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유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예전에 어떤 선생님께서는 “진정한 도사란 산이 아니라 사람들 틈에 사네”라고 말씀하셨다. 옆에 있어도 그가 도사인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러워야 진정한 도사인 것이다. 산을 고집하거나, 상황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지 못하고 도드라지는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 것이다. 필자는 그 깨달음은 삼겹살 먹는 승려에게서 얻었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하였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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