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 “야! 너무 형이상학적이다”라고 말하고,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비근한 이야기는 그와 반대로 형이하학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너무나 심오해 보여서, 그것을 듣는 순간 경외감과 거부감을 함께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안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이다. 필자는 이 말을 “그럴싸한 뻥”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근엄한 독자들은 필자의 경박함을 꾸짖을 준비를 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꾸짖음은 이 글을 다 읽은 뒤로 잠시 미뤄주시기 바란다.
필자의 딸이 3살 때, 몇 가지 꽃을 알려주었더니 다른 꽃들도 보기만 하면 그것이 꽃인지를 알아본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 세상에는 많은 꽃이 있다. 그런데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인데, 우리는 왜 그 모든 것을 꽃이라 부르는 것일까?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했다는 것은 근대적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근대와 중세를 가르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형이상학과 계약’이라는 개념인 것이다. 설사 계약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 해도, 골목길에서 입 맞추는 연인의 행위도 사랑이고, 자식에게 회초리를 때리는 아버지의 행위도 사랑임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계약론에 익숙하지 않은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다른 방식의 설명을 필요로 했다.
어떤 사람 따르면, 태어나기 전에 우리의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살았다. 그곳에는 우리의 영혼과 신들이 산다. 이 신들 가운데 하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신은 피조물을 만들 때 하늘나라에 존재하는 것들을 본 따서 만들었다. 하늘나라에 있는 것들이 일종의 설계도인 셈이다. 그런데 그 신의 능력이 전지전능하지는 못했나 보다. 피조물을 설계도와 정확히 똑같이 만들지는 못한 것이다. 흔히 우스개로 말하듯이, 흑인은 너무 구워졌고 백인은 덜 구워졌다는 둥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그래서 세상에는 다양함이 생기게 되었다. 다양한 꽃, 책상, 동물,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하늘나라에 살던 우리의 영혼은 이 세계로 내려와 육체와 결합하게 된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이 세계로 내려올 때, 영혼은 사막을 지난 후 강을 건너게 된다. 사막을 지난 터라 목이 마르니, 모든 영혼이 강물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 강물의 이름은 ‘레테(lethe)’며, 이는 우리말로 ‘망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기억을 잊고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현실에 존재하는 여러 사물들을 보면, 정확히는 아니지만 잊고 있었던 하늘나라의 사물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나 첫사랑처럼, 까맣게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대상을 만나면 당시의 일이 떠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망각의 강물을 마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동네나 첫사랑처럼 또렷하지는 않다. 하지만 꽃을 보았을 때 그것이 하늘나라의 꽃과 유사한 정도는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을 보아도 그가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긴 손수건꼬리 원숭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더라도 그것을 만나면 원숭이임을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표준적인 ‘사람’과 ‘원숭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동종에 속하는 것을 만나면 그것들이 동종임을 바로 알아볼 있다는 것이다. 이치는 동일하다. 우리의 이야기에서 설계도 역할을 했던 하늘나라의 사물이 표준적인 것이며, 이 땅의 존재물들은 그에 대한 모방물이자, 그와 동종에 속하기 때문에, 잠재의식 속의 표준적인 것에 대한 기억을 통해 동종의 대상들을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것은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하늘나라에 있던 설계도와 같은 것들이 이데아인 것이다. 이데아론은 형이상학의 대표적 사례이자, 중요한 철학적 소재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듣다 보면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무당집에 가서 점을 보아도 그럴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 확인하거나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점 또한 둘의 공통점이다. 무당집에서 점을 보는 것이 미신적이라면 형이상학은 미신과 다를 게 무엇인가? 조금 더 그럴싸하다는 것?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형이상학은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미신과 학문의 중간 단계일 뿐이다.
형이상학이라는 말의 유래를 알고 보면 다소 어이없기까지 할 정도이다.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이기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Physica)>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뒤에 매우 난해한 원고가 붙어 있었다. 책을 편집하던 사람이 이름을 어떻게 붙일까 고민하다가, “에이, 모르겠다. 자연학 ‘뒤에’ 있으니 meta-physica라고 하자”라고 한 것이다(meta라는 말은 '~너머', '~뒤에'의 의미다). 게다가 내용상으로도 현실세계 ‘너머’의 절대적 원리에 대한 내용이었으니 금상첨화였던 셈이다.
동양에서도 형이상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주역>에서는 “형이상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를 기라고 한다(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라고 적고 있다. 이 구절만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는 ?원인(原人)?이라는 글에서 “저 위에 형체가 있는 것을 하늘이라고 하고 아래에 형체가 있는 것을 땅이라고 한다(形於上者謂之天 形於下者謂之地)”라고 적고 있다. 형이상의 도란 하늘나라의 일을, 그리고 형이하란 이 땅의 사건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하늘나라에서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과학적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의 일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형이상학이다.
검증할 수 없는 절대적인 원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반론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계룡산에서 도를 깨우친 사람들은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 모두가 어리석을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힘을 가진다면, 당연히 힘으로라도 사람들을 제어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형이상학은 소수 지배의 논리적 근거인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대, 경기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 ‘유학의 갈림길’이라는 두 권의 전문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 ‘포르노를 허하라’라는 대중 교양서를 저술했다. 현재는 저술과 더불어 로스쿨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ciokr@id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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