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 맛있는 한끼, 서울(38) 을지로 ‘세진식당’
하루하루 그 속도감을 미처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변화무쌍한 서울, 그나마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살이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을지로 뒷골목이다.
허름한 단층 건물들, 철공소는 시대의 유산이다. 아직도 팔뚝이 굵은 사내들은 20여 년 전처럼 웃통을 벗고 등목을 한다. 그들이 찾아드는 단골 식당이 있으리란 짐작에 골목을 기웃거리고 이내 자리를 잡았다.
을지로3가 ‘세진식당’은 오래 영업했고 또 오래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다. 메뉴는 전형적인 밥집이다. 팔지 않는 것이 없다.
김치찌개, 된장찌개부터 제육볶음 낙지볶음 등 술안주 구색도 상당하다. 메뉴판은 따로 없다. 벽에 붙은 나무판자에 메뉴를 새겨
넣었다. 테이블은 낮고 의자는 삐걱거린다. 주방은 훤히 트여 속까지 다 보인다. 그 주방에 서 있는 두 노인의 허리는 굽어 땅에
닿을 것만 같다. 그러나 음식은 한 번도 늦는 일이 없고 그 맛이 변하는 법도 없다.
이곳에 오면 둘에 하나는 시키는 메뉴가 있다. 오징어볶음이다. 가장 쉽고 가장 대중적인 음식인 오징어볶음을 굳이 따로 청해 먹는
일은 많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 집 오징어볶음은 밥반찬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술안주다. 농도
짙은 양념에 빠르게 볶아낸 오징어볶음은 늘 하얀 김과 함께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단맛이 은근히 느껴지는 매콤한 오징어볶음은 태국
같은 동남아에서 먹을 수 있는 향신료 요리와 맥이 닿아 있었다. 영업용 가스버너의 강한 화력이 만들어낸 뜨거운 기운이 접시 위에
서려 있었다.
조금 더 본격적인 요리를 찾자면 홍어 삼합이 있다. 서울에서 홍어를 먹자면 전문점이란 간판을 내거는 집에서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이 집은 허허실실 아무렇지도 않게 홍어를 팔고 그 맛은 전문점을 뛰어 넘는다. 숙성의 정도는 전라남도 나주와 같은
내륙이 아닌 목포에서 맛볼 수 있는 얕은 수준이다. 본래 내륙으로 올수록 홍어의 암모니아 향이 더 강해진다.
해안가는 그 숙성의
정도가 낮다. 신선한 원물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다. 이 집 홍어는 산뜻한 향을 내고 곁들이는 수육은 삶았다 한번 식혀 쫀득한
식감이 살아 있었다. 그 둘을 아우르는 전라도식 묵은지는 텁텁한 잡맛이 없고 향을 피운 듯 산뜻한 내음만 남았다. 날이 서늘하면
민물새우를 한 숟가락 넣어 고소한 생태찌개를 먹었고, 단정한 기분이 들면 갑오징어 수육을 시켜 옛 선비처럼 고고하게 술잔을
들었다.
이곳이 얼마동안 을지로를 지킬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의지도, 식당의 의지도 아니다. 언젠간 지도에 나오지 않는 좁은 골목도,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간판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노포골목의 작은 식당이 일상에 쫓기는 사람들의 마음 속 허기를 오래도록 채워주길 바래본다.
[출처 : http://mediahub.seoul.go.kr/archives/1164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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