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OPEC회원국들은 1970년대 ‘오일쇼크’의 최대 수혜자에서 현재 최대 피해자의 위치에 섰다.
에너지가 주요 선진국들의 ‘정치화’ 산물이 된 시기는 1, 2차 오일쇼크를 겪고 난 이후다. 이전까지 에너지는 안보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기보다 선진국이 신생독립국가에 대한 영향력의 수단이라는 인식이 컸다.
하지만 1970년대 OPEC은 석유를 무기화해 공급량을 줄였고 이에 맞서 국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국 간 석유 긴급운용시스템을 가동했다. 게다가 OECD 회원국들은 대체에너지 개발에 힘을 기울이는 등 에너지가 각국의 보안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에 앞서 OPEC의 설립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9년 베네수엘라는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에 석유수출국 상호 간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상호 교류 및 협력 방안을 모색할 것을 제안했다.
10년 후인 1959년, 메이저 석유회사들이 베네수엘라산 원유 및 중동산 원유 가격을 인하한 데 따른 대응책으로 ‘아랍석유의회’(Arab Petroleum Congress)를 카이로에서 개최했다. 이어 석유회사들에게 유가 인하 전 산유국 정부와 협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유가협의위원회(Oil Consultation Commission) 설립에도 합의했다.
1960년 석유회사들은 중동산 원유 가격을 추가 인하했고 같은 해 9월 이라크 정부가 이란, 쿠웨이트, 사우디, 베네수엘라 정부를 바그다드로 초청해 대응책을 협의했다. 이에 OPEC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을 보면 OPEC의 창설은 석유회사들로부터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이뤄진 것이다. 석유회사들은 원유 가격을 낮추고 이를 통해 막대한 마진을 남겼기 때문이다. 당시 원유는 1배럴(159리터)당 1달러였으며 휘발유 기준 1리터도 1달러였으니 석유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폭리를 취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OPEC은 출범 이후 그 목소리를 높여갔으며 이에 힘을 실은 인물이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였다.
1969년 9월 카다피는 이슬람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고 리비아의 모든 자산은 국유화가 됐다. 이때부터 리비아는 미국의 영향력 밖에 있는 국가가 된 것이며 이 과정에서 주목할 기업은 옥시덴탈 페트롤리움이다.
당시 미국인인 아만드 헤머는 이 기업의 경영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란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유전 개발을 진행시키고 있던 리비아와 석유 개발 및 거래를 통해 북해 유전 개발 등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 이에 ‘세븐시스터즈’(7sisters)라 불리는 글로벌 메이저 석유의 뒤를 잇는 규모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카다피의 등장으로 리비아의 모든 자산이 국유화되자 옥시덴탈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여타 산유국들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그들의 생존권인 ‘유가의 정상화’를 이뤄냈다.
결국 OPEC은 이때부터 주요 국제기구로 부상했으며 OPEC 회원국들은 자국 내 석유산업을 장악하고 국제 석유 시장에서 유가 결정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그 영향은 1973년, 1979년에 각각 ‘오일쇼크’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경제에 충격을 줬다.
경제 충격의 대표적인 사례는 유가 상승 폭이 1차 때보다 높았던 2차 오일쇼크 당시 이전 8~9% 수준이었던 미국채 수익률이 15%까지 상승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금리가 상승하면 채권 가격은 하락한다. 유가상승의 여파로 경제충격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채 가격의 급락 즉, ‘미국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하락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미국채 가격이 이 정도로 폭락했다면 여타 국가들의 국채 가격은 얼마나 하락했는지 그 심각성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다. 결국 에너지는 미국의 입장에서 국가 안보차원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된 셈이다.
이러한 과거사를 이해한다면 왜 미국이 그토록 ‘셰일혁명’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그림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2014년 여름 국제 원유 시장에서 ‘폭락’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시 1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드는 유가는 현재 불과 1년이 조금 넘는 시점에 30달러로 내려앉았다.
한편, 유가가 폭락하기 이전인 지난 2013년 12월 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양적완화축소(테이퍼링)를 발표했다. 당시 미 금리인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장금리는 상승하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준의 자산 4조달러의 대부분이 미국채로 이뤄져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과거와 같이 유가의 급등으로 미국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운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주체는 연준이 되는 셈이었다. 막대한 자산을 풀어 국채 가격의 하락을 막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미국의 경기부양책은 ‘3차 오일쇼크’가 발생할 경우 상당히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던 것이다.
‘셰일혁명’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에너지 시장을 만들어냈으며 미국채 가격의 안정적 유지에 한 몫 하는 등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중동의 에너지·외교정책 변화… 미국 정치력의 영향
‘셰일혁명’은 미국의 중동 원유의존도 감소와 오바마 정부의 對 중동 외교정책 변화로 인해 중동국가들의 대외전략도 변화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국가는 사우디아라비아이다.
그동안 사우디는 기본 외교전략으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우방국 역할은 물론 최대 석유공급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했다. 과거 이슬람혁명, 메카사원 점거 사건,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이란-이라크 전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걸프 전쟁 등은 양국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러한 관계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현재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사우디의 반대를 무시하고 행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이라크 내에서 시아파 이슬람 정권이 탄생한 결과를 낳았다.
이란은 대표적인 시아파 정권으로 이라크와 시리아를 지원하고 있으며 사우디는 수니파의 대표적인 국가다. 즉, 사우디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이란으로 하여금 중동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친미·사우디 성향의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이 2011년 2월 이집트 혁명으로 퇴진하고 이슬람 정권이 탄생하게 된 것도 미국의 책임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심은 미국이 먼저 시작했다. 2001년 9·11 테러 사건으로 사우디와 이슬람 과격단체간의 연관성에 의혹을 제기했으며 미국 내 사우디를 포함한 중동국가에 대한 불신도 증대됐다.
사우디 왕정의 유지 기반은 석유수출을 통한 외화수익과 미국의 군사적 안전보장에 있다. 하지만 국제 정치전문가들은 오바마 정부의 대중동 정책이 사우디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며 사우디 또한 이를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국가가 이란이다. 이란은 최근 서방국가와 핵협상을 타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사우디는 ‘원유 치킨게임’으로 이란을 압박하는 형국이다.
만약 이란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경제제재가 풀린다면 중동지역의 패권은 이란으로 넘어갈 확률이 높아진다. 이번 OPEC의 결과는 서방국가들과 중동 국가들 간 에너지 주도 싸움은 물론 중동 지역 내에서는 사우디와 이란의 힘겨루기라고 할 수 있다.
OPEC 출범 당시 힘을 모았던 두 국가가 서로를 경계하는 형국이 돼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는 OPEC의 힘이 약화됨을 말하며 ‘분열’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의 대중동 정책은 이미 성공한 셈이다.
[출처 : http://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74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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