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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III/Thinking

카밀로(Giulio Camillo)의 기억극장(Theatro della Memoria)

이 새로운 공간은 이른바 '기억극장(Theatro della Memoria)'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기억극장'은 카밀로(Giulio Camillo)라는 사람이 16세기 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활력을 이어가던 베네치아의 궁정에 세운 목조() 극장이었다. "최소한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충분"했다고 전해지는 이 극장은 극장치고는 너무 작았지만 나름대로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의 축소판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극장은 특이하게도 무대와 관람석이 서로 뒤바뀌어 있었다.

여기서 관람자는 무대 위에 올라서서 마치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듯 보이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 및 히브리 밀교(cabbala)의 기호들과 대면하게 된다. '기억극장'은 르네상스시대에 유행했던 '비학()'을 토대로 그간 인류가 축적해온 우주의 비밀에 대한 지식을 새로이 체계화한 곳이었다. 그것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도서관이었으며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들은 소장된 책들의 청구기호였던 셈이다. 이 신설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자는 이곳에서 우주의 숨은 원리를 전수받고 그럼으로써 홀로 창조주와의 교감을 이룰 수 있었다.1)


카밀로(Giulio Camillo)의 기억극장(Theatro della Memoria) 설계도.



기억극장은 오늘날 보면 참으로 기이하게만 여겨진다. 여기서 '기억'은 특정한 과거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우주 전체의 비밀에 대한 기억을 의미하며 따라서 창조주와 인간을 재결합시키는 마술적 도구로 기능한다. 이러한 발상은 현대인에게는 어처구니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16세기 진열공간의 이해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15세기 이탈리아의 진열실도 과거와 대화를 나누는 곳이었지만 특별히 과거를 '기억'한다는 발상은 작용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만물은 상응할 뿐이었다. 고대 영웅의 흉상과 일각수의 뿔은 모두 현 수장가의 지배력을 상징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는 진열실이 과거의 '유산'과 만나는 곳이라는 인식이 싹트면서 '기억극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모방하게 된다. 기억극장은 진열실에서 무엇이 기억되어야 하며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 기억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모형을 제시하였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의 박물관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매우 전근대적인 원리에 기반하고 있었다.

기억극장은 고대로부터 전수된 '기억술(ars memoriae)'을 극장의 형태로 가시화시킨 것이었다. 기억술이란 책이 보편화되지 못했던 시절에 인간의 체험을 지적으로 분류하고 저장하며 유통시키는 기법이었다. 인간의 풍부한 체험은 오로지 말로써 밖에는 전달될 수 없었는데 그것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말 속에 담긴 정보가 생생한 이미지들에 결부됨으로써 말의 논리는 이미지의 질서로 재편된다.

그런데 이 이미지들이 허공에 떠돌지 않게 하려면 그것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했다. 그래서 친근하면서도 상상적인 '기억의 장소(loci memoriae)'가 등장한다. 그것은 일종의 도서관 또는 데이터베이스로서 여기에 이미지들이 체계적으로 배치된다. 이로써 이미지들에 담겨 있던 각각의 '데이터'는 비로소 확고히 저장되고 동시에 '생생한' 기억으로서 반복해서 불러낼 수 있게 된다. 마치 구름 속과도 같은 이 '기억의 장소'를 소요하다보면 어느새 우주의 숨은 질서가 모습을 드러낸다.2)

고대로부터 체험과 지식의 보고이자 전달수단으로서 기능해왔던 기억술은 한때 스콜라철학의 "머리카락을 세는 엄밀함"에 밀려 주춤하기도 했지만 16세기에 들어서 다시금 활성화된다. 기억술로 불러일으켜지던 공간과 이미지가 카밀로의 기억극장을 통해 현실화된 것이다. 그곳에서는 무수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들이 인류가 쌓아온 지혜를 보존하고 재생시킨다. 16세기의 유럽은 근대과학과는 다르지만 나름의 정연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15세기 중엽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활자문화가 거세게 밀어닥치자 고래의 '기억술'을 사수하기 위한 다분히 보수적인 움직임이 일어났고, 결국 기억극장과 같은 새로운 '기억의 장소'가 창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 루돌프 2세의 쿤스트캄머가 놓여 있었다. 심미적이면서 지적이었던, 그렇기에 지극히도 16세기적이었던 이 지배자는 다분히 이교()의 혐의가 짙었던 브루노(Giordano Bruno)의 마술적 우주론에 심취되어 있었고, 그의 프라하궁정은 이미 당대의 '비학'을 보호하는 요새로 자리잡고 있었다.3)


쿤스트캄머와 같은 실내공간에 적용된 기억극장의 원리는 정원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예를 따라 16세기의 지배자들은 자신의 정원에 고대 조각품들을 진열해놓기를 즐겼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고대 영웅들과 자신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정원은 조각품들의 이미지를 통해 잃어버린 고대세계를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의 장소'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또한 정원을 수놓고 있는 식물과 동물은 잃어버린 낙원인 에덴동산을 상기시키기 위한 일종의 무대장치였다. 이 시대 사람들은 '세계라는 극장'에서 내부와 외부공간이 상통하고 자연과 인간이 만든 작품이 통일되어 있다고 믿었다. 결국 16세기 유럽의 진열공간은 한편으로는 15세기 이탈리아의 것을 확대시킨 것이었고, 동시에 '기억의 장소'라는 새로운 위상을 부여받게 되었다. 진열실이 기억의 장소라는 발상은 이후 박물관의 탄생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장에서 더 논의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억극장 (박물관의 탄생, 2004. 5. 15., ㈜살림출판사)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5849&cid=42037&categoryId=42037&expCategoryId=42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