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감사하라”는 예수의 말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드높은 깨달음이자, 행복으로 가는 소박한 지혜다.
그러나 믿음은 합리적이지 않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어린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나님이 세월호를 침몰시켰다”거나 “하나님이 식민지배와 분단을 주셨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보면 신이 나쁜 짓만 골라 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신에 대해 생각할 때 인간의 이성은 반드시 역설에 빠진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 국가인 덴마크에서 살았기 때문에 신을 화두로 사색했다. 그는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성실하게 추론했다. 이성으로 파악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절대자가 아니었다.
절대자는 역설이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었다. 세상에서 오해받고 십자가를 진 예수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진 고독한 사람이 참된 기독교인이었다. 예수가 다시 온다면
나팔을 불며 자기가 예수라고 광고하며 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역설이다. 현실의 기독교는 예수의 삶과 정반대로 가고 있다. 이
또한 역설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세속의 권력과 부를 숭배하는 덴마크 국교와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살았던 에피큐러스는, 신(神)이 전능하고 선하다고 주장할 경우 모순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악한 것이다.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도 역설이다. 신이 있다면 죽지 않을 것이다. 신이 죽었다면 애초에 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니체는 신의 관념을 극복한 인간을 꿈꾸었다. 기독교의 ‘노예도덕’에서 서구 문명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인류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라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모두를 위한,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었다. 니체를 이해한 사람은 예상대로 매우 드물었다. 그는 ‘신’이란 말 없이는 동시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었고, 결국 역설에 갇혀서 미쳐 버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으로 “신이 없다면 인간이 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신은 절대 죽지 않는다. 하늘에서 신이 죽으면 땅에서 신이 자랄 것이다. 그는 니체를 몰랐지만, 만일 알았다면 무신론자의 파국이라고 했을 것이다. 신의 불멸을 믿는 사람의 ‘믿음’이야말로 불멸인 것 같다. 인간이 죽어야 신도 죽을텐데, 그렇다면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셈 아닌가? 이 또한 역설이다.
2천년 가까이 기독교 문화 속에서 살아 온 서양 사람들은 ‘신’이란 말을 떼놓고 사고하기 어려웠다. 프랑스 시인 라마르틴은 “신은 세상을 창조하다 말고 낮잠을 자러 갔다”고 투덜댔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조국 폴란드가 러시아에게 잔인하게 짓밟혔다는 소식을 듣고 미칠듯이 신을 저주했다. 인간의 자유를 예찬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마저 신에 대한 토론이 책 전체의 1/3에 달한다.
우주의 기원을 탐구하는 현대 과학자들조차 빅뱅을 얘기할 때 ‘창조’란 말을 쓴다. ‘빅 히스토리’를 주창한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시간의 지도>에서 인간의 기원을 ‘현대의 창조 신화’에 비유해야만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은 21세기에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동성애자보다 더 심한 곤욕을 치러야 한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신앙을 검증받아야 한다.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는 “미국의 무신론자여, 커밍아웃하라”고 외쳤다. 양심의 자유를 누리려면 용감하게 정체성을 밝혀서 스스로 기본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킨스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종교가 합리적인 사고를 방해하며 평화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무신예찬>이란 책은 신을 믿지 않는 50명의 다양한 무신론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자기 신을 내세우며 싸운다면 신은 누구의 편이란 말인가? 신이 이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다 들어준다면 인류는 벌써 멸종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역사 속의 무수한 악행과 비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간은 신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지 않은가?
도킨스는 미국이 신정국가로 흘러가는 걸 경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겠지만, ‘무신론’이란 용어는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이 말이 불러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이미지 때문이 아니다. ‘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프레임으로 들어가서 논쟁하면 결론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을 믿지 않는 이유는 신을 믿는 이유만큼 다양하며, 어느 입장이든 대칭되는 논거를 끝없이 제시할 수 있다. 양쪽 모두 자기 신념을 미리 전제한 뒤 논증하는 순환론에 빠져 있으므로 애초에 토론이 되지 않는다. 도킨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대한 논증을 어떻게 일일이 감당할 생각일까.
근본주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결국 신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미국의 대럴 레이는, 종교가 우리의 삶과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하면서 ‘갓 바이러스’(God Virus)란 개념을 도입했다. 인간은 ‘신’이란 말을 써도 사고할 수 있고, ‘신’이란 말을 안 써도 사고할 수 있다. ‘신’이란 관념을 갖고도 양심적일 수 있고, ‘신’이란 관념을 버려도 양심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신’(神)은 정상적인 사고에 쓸데없이 덧붙여진, 불필요한(superfluous) 관념 아닐까?
레이의 <신들의 생존법>에 따르면, 신(神)은 인간의 두뇌에 끼어 있는 바이러스와 같다. 이 바이러스는 병원체처럼 숙주를 감염시키며 집요하게 번식한다. 숙주는 자기가 병에 걸렸다는 걸 완강히 부인하고, 자기 합리화의 논거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레이의 접근법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만, 믿는 이들의 격렬한 반발을 일으킬 뿐 효과적인 치료제는 아닌 것 같다. “너 예수병 환자야” 하는데 순순히 동의할 기독교인이 어디 있겠는가?
신이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을까? 우주 밖에? 우주 안에? 바이러스가 되어 우리 뇌 안에?
차라리 “신은 관념과 언어로 존재하지만,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훨씬 간명할 것 같다. 존재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쿨(cool)한 기독교 신자라면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빅뱅을 밝혀낸 우주론의 성과에 기대어 에피큐러스처럼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신이 아니다. 신은 우주 밖에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우리와 관계가 없다.”
기독교의 나라 미국에서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개신교의 비율이 미국 역사상 처음 50% 아래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개신교는 53%에서 48%로, 기독교는 78%에서 73%로 줄었다. 반면 ‘특정 종교 없음’은 15%에서 19%로, ‘무신론’은 1.6%에서 2.4%로 증가했다(퓨 리서치센터, 미국 성인 2,973명 대상 조사, 2012). 인류가 진화하면서 신의 숫자가 줄어들어 왔다는 우스개가 있다. “인류의 종교는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진화했고, 곧 영(零)신교로 진화할 것”이라는 것이다.
레이의 이론에 따르면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은 ‘갓 바이러스’를 완전히 떨쳐버린 자유로운 인간 아닐까. 니체는 신에 의존하지 않는 지혜롭고, 생명력 넘치는 인간을 꿈꾸었다. 이 ‘초인’이 가능한지 여부를 떠나, 전인류가 ‘초인’으로 진화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걸 앞당기려고 조바심한다면 니체처럼 미칠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일단 평화롭게 공존하는 예의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종교의 좋은 면까지 부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소통을 촉진하는 종교의 순기능은 구석기 시대
크로마뇽인이 이미 증명했다.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하고 크로마뇽인이 살아남은 건 종교 의례를 통해 동질감과 네트워크를 이뤘기
때문이기도 했다. 종교가 다양해지면서 여러 부작용도 생겨났다. 기독교의 다양한 분파도 마찬가지였다.
[출처 : 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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