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는 체계적인 철학 이론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이론을 만드는 대신 ‘신은 죽었다’
‘르상티망(ressentiment·원한, 복수심)’ ‘노예의 도덕’ ‘선악을 넘어서’ ‘좋음과 나쁨’ ‘니힐리즘’ ‘힘에의 의지’
‘영원 회귀’ ‘위버멘슈(Ubermensch·초인)’ ‘운명애(amor fatia)’ 같은 개념과 은유를 시어(詩語)처럼
내뿌렸다. 이런 비체계성 때문에 니체 사상은 보수적인 사상가나 급진적(무정부주의적) 사상가 모두 자기 입맛에 따라 해석하고
전유하는 일이 가능했다. 정동호의 <니체>(책세상)는 급진이나 보수 가운데 어느 관점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
밋밋하게 느껴지지만, 아무런 착색 없이 있는 그대로의 니체를 만나게 해준다.
열여덟 살에 처음 격심한 두통을 겪은 이래 평생 시난고난 앓았던 니체는 매우 역설적이게도 서양 역사를 병들게 한 병의 뿌리를
찾고, 그것을 치유하는 일을 자신의 철학적 과업으로 삼았다. 그는 서양 역사를 병들게 한 시발점으로 플라톤을 지목했다.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와 현상(땅)으로 나누고 전자를 참된 것으로 동경하는 한편 후자를 가상의 것으로 폄훼했다. 플라톤이 기초한 ‘두 세계
이론’에 따라 인간은 현상이 아닌 본받아야 하는 이상의 세계를 우위에 놓게 되었고, 동물적인 본성에 휘둘리는 육신보다 순수하고
고결한 영혼을 떠받들었다. 플라톤의 세계에서 현상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육신은 영혼을 구속하는 감옥이다.
두 세계 이론은 현실도피적인 세계관과 패배주의적 인생관을 조장한다. 플라톤을 서양 정신사상 유례없는 재앙으로 규정하는 니체가 현세와 육체에 긍정적인 디오니소스를 추앙하게 된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디오니소스는 본능에 충실함으로써 플라톤의 가치를 전도시켰다. 그러나 서양 역사는 점차 디오니소스를 배척했고, 그리스도교의 등장은 두 세계 이론을 더욱 강화했다.
인간은 원래 저편의 천상 세계에서 영원하고 행복한 삶을 누렸으나 육신의 허물과 죄로 인해 이편의 지상 세계로 쫓겨나 고통 속에서 살게 되었다(실낙원). 하므로 인간은 저주받고 버림받은 육신의 세계를 벗어나 영원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축복받은 저편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복락원). 니체는 이런 논리에 바탕한 그리스도교를 ‘민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 부르면서, “플라톤주의의 승리이자 동시에 생에 적대적인 형이상학의 승리였다”라고 주장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까닭
‘신은 죽었다’라는 대담한 선언은 유신론자에게는 당연히 그랬겠지만, 알고 나면 무신론자에게 더 끔찍한 선언이다. 니체는 종교를 사제 집단의 권익과 약자들의 르상티망이 합작한 산물이라고 본다. 사제 집단은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위해 도덕과 죄의식이라는 무기를 발명해 벼리었으며, 약자들로 이루어진 대중은 강자들로 이루어진 귀족 계급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착함·겸허·순종·인내·용서 따위의 미덕을 궁리해냈다. 원수를 사랑하라느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주라느니 하는 예수님 말씀은 다 약자의 강자에 대한 “증오와 복수”에서 나왔다. 니체는 민주주의·사회주의·민족주의·여성주의 등 평등에 근거한 온갖 근대 사상을 그리스도교 복음의 세속화된 형태로 본다. 유신론자든 무신론자든 같이 놀라야 할 것은 신의 죽음이 아니라, 그 선언이 사랑·동정·박애와 같은 이상마저 몰살했다는 점이다. 니체에게 그것들은 신과 함께 합장해야 할 노예의 도덕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는 도덕이 없다. 200㎜ 넘게 쏟아진 봄비가 좋거나 나쁠 수는 있어도, 비는 선하게도 악하게도 내리지 않는다. 인간에게 자연으로 돌아가 본성을 찾으라고 촉구하는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 좋음과 나쁨이라는 긍정적이고도 단순한 생의 가치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가진 게 돈밖에 없는 누군가가 하루 일당 5억원짜리 ‘황제 노역’을 하든 말든, 그것은 오로지 좋음과 나쁨으로만 재단할 수 있지 선악 개념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는 게 니체의 말씀!
신도, 사랑도, 동정도, 도덕도, 선악도 없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니힐리즘(허무주의)밖에 없다. 소극적·수동적 허무주의자는 바닥(ground)이 사라진 무(nihil, nothing)의 사태 앞에서 절망한다. 하지만 적극적·능동적 허무주의자는 ‘경기가 바닥을 쳤다’고 말할 때의 그 심연을 차고 솟아오른다. 평범한 중간치들만 이 사태 앞에서 염세에 빠질 뿐, 애초부터 노예의 도덕에 물들지 않았던 적극적·능동적 허무주의자는 이 사태를 새로운 세계 창조의 조건으로 삼는다.
용감한 허무주의자가 창조의 조건으로 환영하는 상태란 자연일 수밖에 없으며, 니체는 문명의 작위가 없는 바로 이 자연을 편애한다. 자연 속에서는 선악이 끼어들 여지가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힘밖에 없다. 정동호는 니체가 자연의 유일한 원리로 내세운 이것을 일관되게 힘에의 의지라고 번역했는데, 이 역어는 전공자들 사이에 아직 만족할 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개마고원)를 쓴 김진석은 한국의 니체 전공자에게는 니체로부터 현실주의 정치를 거세하려는 학풍이 강하다면서 형이상학적이고 자연철학적 원리를 연상시키는 힘에의 의지 대신 구체적인 현실을 드러내주는 ‘권력에의 의지’라는 역어를 선호했다.
하지만 니체의 실상을 보여주는 정동호의 <니체>는 굳이 권력에의 의지를 강조하지 않아도 니체가 현실주의 정치와 멀찍이 떨어져 있지 않음은 물론, 그가 어떤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니체에게는 초월적인 이데아가 없으므로 세계는 닫힌 계(界) 안에서 무의미한 영원 회귀만을 반복하게 된다. 초인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위버멘슈만 이 로도스에서 창조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열등한 대다수에게는 폐쇄 속의 반복을 사랑하는 운명애만 주어져 있다. 이런 상항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압도적인 대다수가 직면해 있는 신자유주의 천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올더스 헉슬리는 <훌륭한 신세계>에서 ‘소마’라는 약을 통해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신세계를 제시했다. 니체는 이 소설을 미처 볼 수 없었지만, 인간 세계에서 고통을 없앨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유토피아 사상을 거부했다. 세상에 고통이 없다면 그것을 극복하려는 힘에로의 의지나 위버멘슈가 탄생할 수 없다. 인간 세계로부터 고통을 덜어주거나 고통을 평준화하겠다는 사회복지니 고통 분담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인간을 퇴화시키는 악덕이다. 니체는 서양 역사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자였으나, 휴머니즘을 가장한 그의 반시대적 광기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Libertarian)들의 교설이 되었다.
[출처 :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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