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어떤 나라인가?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쪽 연안에 있는 세계 유일의 유대인 국가이다. 아랍계 원주민은 이 지역을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러왔다. 아랍계 원주민들은 여기에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를 세우려 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아직 정식 국가로 인정되고 있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1974년 유엔의 비회원 참관 ‘단체’가 되었다가 2012년 비회원 참관 ‘국가’로 격상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왜 싸우고 있나?
이 지역에 거주해 온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들이 늘 이렇게 싸웠던 것은 아니다.
수천 년간 평화롭게 공존하던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 간의 갈등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발호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자 유대인들은 유대인만의 독립국가를 수립하자는 ‘시온주의’에 호응해 팔레스타인에 몰려들었다.
1차 세계대전까지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의 몰락 이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11월 영국의 발푸어 외무장관은 영국 유대인 협회 회장인 로스차일드에게 편지를 보내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 민족의 나라를 세우기에 적합한 땅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엔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려는 구상도 영향을 끼쳤다.
유대인들은 영국의 후원 아래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당시 전세계 유대인의 90%가 유럽에 살았는데, 시온주의가 국제적 움직임이 된
시점인 1896년과 2차 대전 직후인 1948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아랍인들 대부분은
유대인의 집단적 이주를 제국주의적 식민지 침탈의 연장선으로 간주했고 이 때부터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는 아랍계 원주민과 이들의
노력을 근절하려는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오랜기간 분쟁을 겪었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을 둘로 나누어, 65만명의 유대인을 한 쪽에, 두 배 이상의 아랍계 원주민을 다른 쪽에 배치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유엔의 결정은 결국 실패했고, 이 지역에 이주한 유대인들은 1948년 봉기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선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1947년 유엔은 양쪽에게 이 지역을 둘로 쪼개 나눠주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주변의 아랍 국가들은 네차례 전쟁을 치렀고 오늘날의 경계선은 이 전쟁들의 결과에 따라 만들어졌다.
비아랍계 국가 수립에 반대하던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 등의 인접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 국가 수립에 반대해 1948년에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들의 무참한 패배였다. 이스라엘은 애초 유엔이 정하려 했던 국경을 넘어 영국령
팔레스타인 땅의 77%를 차지하며 국가를 수립했다. 그나마 요르단은 예루살렘 동부와 요르단강 서안을, 이집트는 가자 지구를
관할하게 되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나라를 세울 기회조차 빼앗겼다.
1948년 전쟁으로 7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이들과 이들의 자손은 현재도 공식적 난민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 그 수는 700여 만 명에 이른다. 현재 이스라엘의 인구는 약 800만 명인데, 이 중 아랍인은 150만 명으로 알려져있다. 이 지역의 아랍인 850만 명 중 80% 이상이 난민인 셈이다.
이스라엘은 1967년에도 이른바 ‘6일 전쟁’을 벌였는데, 그 결과 예루살렘 동부와 요르단강 서안, 가자 지구까지 차지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는 모두 아랍계 난민들이 다수를 차지한 지역으로 국제법상 이스라엘의 영토는 아니다.
요르단강 서안은 사실상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지역으로 계속 이주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이주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과 경찰을 주둔시켰다.
가자 지구는 다르다. 가자 지구로 이주하는 유대인들은 거의 없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군과 경찰이 주둔하지 않는다. 대신 이스라엘은 육상과 해상을 포함해 가자 지구의 외곽을 완전히 봉쇄했고, 심지어 이집트를 압박해 가자와 이집트의 국경도 봉쇄했다.
서안과 가자지구는 어떤 곳인가?
서안(West Bank, 西岸 - 서쪽 기슭)은 요르단강 서쪽과 동예루살렘을 포함해 부르는 말이다.
1967년 전쟁 이후 서안을 군사력으로 장악한 이스라엘은 자국민들의 이주를 장려하는데, 이 때 이주한 이스라엘인들이 사는 마을을
‘정착촌’이라고 부른다. 정착촌으로 이주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은 경찰과 군대를 증원해 나갔다. 정착촌은 대개
이스라엘과 서안의 경계선을 따라 분포하며, 여기에 사는 이스라엘 국민은 5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정착촌이 늘어나면서 원주민인 팔레스타인인들은 통행금지와 불심검문에 시달리게 되었다. 물론 무력으로 점령한 땅에 자국민을 이주시키는 것은 국제법상 불법이다.
이스라엘의 남서쪽, 이집트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가자지구는 182만 팔레스타인 사람이 살고 있는 인구 밀집 지역이다. 1948년 전쟁 이후 이집트가 관할하다가, 1967년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차지했다. 가자에 주둔했던 이스라엘군과 유대인 정착민들은 2005년 철수했지만, 대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이에 따라 가자지구의 주민들은 만성적인 전기, 연료, 식량 및 의약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이나 특히 이집트로 이어지는 땅굴은 사실상 유일한 외부로 통하는 통로이며, 이 땅굴을 통해 생필품의 교역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은 이 땅굴이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의 무기 수입 경로가 되고 있다면서 땅굴 파괴를 가자지구 침공의 주요 명분으로 삼고 있다.
시온주의(Zionism)란 무엇인가?
시온은 원래 성경에 나오는 다윗왕이 함락한 성의 이름이자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시 하는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인데 나중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시적인 표현이 되었고, 현재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시온주의는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즉 유대인들이 조상들의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대인들이 시온주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한 건 근대 민족주의가 유럽을 휩쓸던 19세기부터이다. 유럽에서 점점 심해지던
반유대주의 (anti-Semitism)를 직접 겪으며 유대인들이 국가를 세우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믿게 된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즐 (Theodor Herzl, 1860~1904)이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이 집단 이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1896년 즈음부터 시온주의는 국제적 움직임으로 자리잡는다.
그 이후 극단적 반유대주의를 내세운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을 즈음에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숫자가 2만 명에서 16만 명으로 급증한다.
시온주의자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1970년대 말까지 이스라엘 정치권의 주류를 형성했던 시온주의 좌파는 국가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하고, 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원하며 팔레스타인인에게 일부 영토를 돌려주고 아랍국가들과 공존하고 싶어한다. 반면, 현재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시온주의
우파는 국가가 종교적 색채를 띠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등 좌파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 국가들은 대체로 시온주의를 반대한다. 시온주의는 강력한 선민의식에 기반하고 있어 전세계 어디에 사는
유대인이건, 그가 원하기만 하면 이스라엘 국적을 바로 얻을 수 있다.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부여하지 않는 권리이다.
때문에 아랍
국가들은 시온주의를 팔레스타인인을 내쫓기 위한 계책이나 종교의 탈을 쓴 제국주의 또는 인종차별주의로 규정해 왔다. 유엔 총회는
1975년 시온주의를 인종차별주의로 규정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 결의안은 1991년 폐지됐다.
PLO, 파타, 하마스는 어떤 조직인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PLO, Palestinian Liberation Organization)는 유엔과 100여 국가로부터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법적 조직으로 인정받고 있다. 파타(Fatah)는 연대조직인 PLO를 주도해 온 다수파 정당이다.
PLO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NA, Palestinian National Authority)를 구성해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을
통치하고 있다.
1964년 창립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완전히 몰아내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1993년, 오슬로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하기로 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이끄는 인물은 온건파 아바스(Mahmoud Abbas)로 그는 자치정부의 수반을 겸하고 있다.
하마스(Hamas)는 팔레스타인 국가수립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자 준군사단체로 1987년 창설되었다. 하마스는 2006년 자치정부
의회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자치정부가 앞서 이스라엘과 합의한 협상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면 사실상 자치정부에서 떨어져 나와 가자 지구를
독립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PLO가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은 요르단강 서안이고 가자 지구는 하마스가 통치하고 있다. 하지만 PLO와 하마스는 지난 4월 23일 연합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 해법은 없나?
가장 가능성이 높은 해법은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다.
두 국가 해법은 현재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대부분을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을 새로운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영토는 이스라엘 땅으로 하여 두 민족이 각각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방법이다.
반대로 한 국가 해법(one-state solution)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합쳐
하나의 국가를 세우는 방법이다. 이 경우 팔레스타인인들은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 모두가 보통선거를 치르는 방법을 선호한다.
팔레스타인 인구가 유대인보다 많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이스라엘은 이 방법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병합하고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스라엘 영토 밖으로 쫓아내거나 이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상식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인정되기 어려운 방법이다.
평화 협상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협상의 가장 성공적인 경험은 1993년 맺어진 오슬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는 데서 양측의 영구적인 평화를
모색하는 협상을 시작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를 땅과 평화의 맞교환(Land for Peace)라고 부른다. 이는 두 국가
해법과 거의 같은 발상에서 나왔다.
하지만 2001년 1월을 기점으로 이 협상은 깨졌다.
우선 이스라엘은 오슬로 협정에도 불구하고 서안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계속해서 진행해 왔다. 서안을 팔레스타인의 땅으로 보는 오슬로 협정을 어긴 것이다. 특히 우경화된 네타냐후 정권은 이를 적극적으로 비호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쪽에서도 이 협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있다. 특히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겠다는 원칙적인 목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다행히 팔레스타인의 양대 세력인 파타와 하마스는 2014년 들어 단일 정부 구성에 합의하고,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하마스의 노선 수정이 가시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마스가 협상 상대로 포함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올해 7월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은 하마스를 약화시켜 그들을 팔레스타인의 협상단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벌어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은 왜 이스라엘을 감싸고 도나?
미국이 지금껏 이스라엘에 보낸 자금은 총 120조 원으로, 지금도 매년 3조 원 가량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결의안에서 매번 거부권을 행사해왔다.
미국이 이렇게 이스라엘을 감싸고 도는 이유로는 미국 내 유대인의 로비능력과 이스라엘을 중동에서의 패권을 위한 교두보로 보는 국제정치 전략이 꼽힌다.
우선 미국에서 가장 높은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을 지닌 인종인 유대인들은 미국의 금융계와 법조계, 언론과 연예계에 대거 진출했으며
친이스라엘 유대인 로비단체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갖췄고 9.11 이후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성전(Jihad)에 함께 맞설 동맹국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지원할 명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도
많다.
이스라엘의 건국 초기에는 미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적도 있었다. 특히 1956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수에즈 전쟁을 두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냉전시기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동 지역까지 뻗어오는 소련의 영향력을 제어할 효과적인 방패막이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1973년 아랍 국가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준 뒤 양국의 관계는 그 어떤 혈맹보다도 탄탄해졌다.
이 기사의 히스토리
이 기사는 2014년 8월 17일 처음 발행됐습니다.
정은선 객원기자가 작성했습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이나 문의는 mail@vop.co.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사는 계속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출처 : http://www.vop.co.kr/A00000784733.html]
'Academy III > Think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Eton College는 자신만을 아는 엘리트를 원하지 않는다 (0) | 2014.09.16 |
---|---|
선전 [propaganda, 宣傳] (0) | 2014.09.05 |
수사학 [rhetoric, 修辭學] (0) | 2014.09.05 |
무정부주의 [Anarchism, 無政府主義] (0) | 2014.09.05 |
Magazine의 시대는 가고, Zine의 시대가 오다 (0) | 2014.09.04 |
'21세기 자본' 피케티가 한국에 보내는 경고 (0) | 2014.09.03 |
'불신'은 21세기 한국 사회의 자화상 (0) | 2014.09.02 |
열정의 신화를 넘어 자신을 찾기 (0) | 2014.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