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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III/Thinking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살롱은 일종의 사교의 장이었다. 20명 미만의 가까운 사람들이 문인, 화가, 음악가, 예술가들과 함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주최자의 거실에 모여 식사나 차를 함께하며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관심거리를 토론하고, 덧붙여 문학, 음악 등을 즐기며 교제하는 곳이었다. 귀족들은 자기 집에 살롱을 열어 자신의 경제적 능력과 학식 그리고 문화 애호의 성향을 과시하려 했다.
 
그 시대에는 잘 교육받은 참한 여성이 20대 초반 전의 어린 나이에, 나이는 좀 있으면서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남자와 가정을 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여인들은 결혼 생활이 주는 감흥이 줄어들 때쯤 바깥세상의 공기를 호흡하며 자신의 문학이나 음악과 예술에 대한 재능을 발산하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곳으로 살롱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젊고 참신한 피아니스트였던 쇼팽과 리스트는 여러 살롱에 초대되었다. 그들이 참석하면 살롱의 분위기는 고급스러워졌다. 리스트는 사람들의 시선과 찬사를 즐길 수 있었기에 살롱을 찾았다. 쇼팽에게는 품위 있는 살롱의 분위기가 자신의 음악에 맞았다. 그리고 크고 번잡한 것을 꺼리는 그는 소규모의 잘 아는 사람들의 모임이 편안하기도 했다.
 
당시 잘 알려진 살롱은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살롱과 영국대사관의 살롱이었다. 오스트리아 대사의 부인이었던 테레즈 다포니(Therese d’Apponyi, 1790~1874)가 운영했던 전자는 구체제의 귀족들이 즐겨 찾았고 후자는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중심이어서 좀 더 현대적이고 개방적이었다.
 
테레즈 다포니 백작 부인은 월요일에는 토론과 대화를 위한 모임을,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는 음악가를 초대하여 연주를 듣는 모임을 주최하였다. 그곳에 모였던 매력적이고 부유한 여인 중 다수는 쇼팽의 피아노 제자였다. 쇼팽이 ‘나는 대사들, 공작들 그리고 장관들이 있는 고위층 사이로 들어갔어’하고 자랑했을 때, 그것은 다포니 백작 부인의 살롱에 초대되고서 느낌을 얘기한 것이었다.



다포니 부인의 남편은 오스트리아 황실의 가족이었는데 그 시대에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실력자였다.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미모에, 활기찼고 노래도 잘했다. 당시 파리 사교계의 명사로서 ‘멋진 테레즈 Divine Therese’로 불렸다. 쇼팽은 그녀의 살롱에 초대되면서 파리의 귀족사회에 제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쇼팽의 녹턴, 작품번호 27의 두 곡은 다포니 백작 부인에게 헌정되었다. 두 곡 모두 쇼팽의 특성이 잘 살아있는 기품 있고 우아한 곡인데 특히 두 번째 곡은 필자의 생각에 쇼팽의 녹턴 중에서도, 녹턴(야상곡)이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다.
 
영국 대사관 살롱의 주최자는 해리엣 그랜빌(Harriet Granville 1784~1862) 백작 부인이었다. 오스트리아 대사관 살롱의 참석자들이 구 귀족 중심이어서 7월 혁명으로 물러난 샤를 10세의 지지자들이 많았던 반면, 자유로운 영국대사관 살롱에는 새롭게 등장한 유산계급 출신들이 많이 모였고 외국출신 인사도 볼 수 있었다.
 
육감적인 폴란드 동포 델피나 포토츠카도 자주 참석했다. 이런 분위기는 외국 출신인 쇼팽을 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특히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올랐던 루이 필리프 왕의 아들 오를레앙 공(公)도 이 살롱에 참석했었다.
 
쇼팽의 영광스러웠던 파리 시절이 루이 필리프 왕의 재임기와 대체로 일치했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본 시리즈 13편 참조) 때문에 쇼팽이 루이 필리프를 좋아했을 것 같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쇼팽이 구체제의 샤를파를 지지했었고 신흥세력 필리프파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포니 부인의 살롱에 친구들이 더 많았던 모양이다.


이태리 출신의 벨지오조소(Cristina Belgiojoso, 1808~1871) 공주의 살롱도 유명했다. 그녀는 10대에 이탈리아의 대부호와 결혼했는데 공작인 남편은 대단한 바람둥이였다. 둘은 결혼 몇 년 만에 별거에 들어갔고 그녀는 매년 큰 액수의 연금을 남편에게서 받았다. 이탈리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당시 그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오스트리아의 미움을 사서 파리로 왔고, 파리에서 남편이 보내 준 돈으로 호화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작가이면서 음악 애호가였던 그녀의 살롱에는 문인과 음악가의 출입이 잦았다. 오페라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도 짧았던 파리 시절, 그녀 살롱의 단골이었다. 그녀의 살롱에서는 특히 음악가들을 경쟁시킨 것으로 유명했다. 물론 결론은 항상 ‘얘도 좋고 쟤도 좋다’였다.
 
마른 체구에 창백한 얼굴의 그녀는 유령같이 보였다. 리스트의 연인이었던 마리 다구 부인은 그녀의 파리 저택의 침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벨리오조소의 침실이 마치 시체 보관소같이 음침하고 스산했다고 했다. 1848년에 공주는 밀라노 봉기에 참여했다가 그것이 실패한 후 급히 파리로 다시 돌아왔는데 당시 밀라노 경찰이 그녀의 가택을 수색했더니 옷장에 그녀의 죽은 옛 애인의 미라가 있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인 쇼팽의 살롱 활동은 당연히 연주와 관련되어 있었다. 쇼팽은 다포니 백작 부인의 살롱에 거의 매주 일요일 참석해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어떤 때는 성악가 초대자의 반주를 하기도 했다. 그곳의 참석자 대부분은 그의 제자이면서, 강력한 후원자들이었다. 친근한 사람들 속에서 연주는 편안했을 것이다.
 
또 다른 살롱에서는 쇼팽과 참석자들이, 음악에 대해 담소하고 노래하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피아노를 연주하고, 다시 담소하고 노래하고 연주하고 이렇게 시간을 보냈다.
 
토론이 많은 살롱의 경우, 쇼팽은 주로 조용히 앉아 얘기를 듣는 쪽이었다. 늦은 시각, 이야깃거리가 소진되고 일부 인사는 자리를 떠났을 때 참석자들은 쇼팽에게 눈길로 연주를 요청했고 그러면 그가 피아노에 앉아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시적 음악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살롱 참석자들은 야심한 때가 쇼팽이 그의 진정한 음악을 풀어 놓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렇게 쇼팽이 살롱 모임의 끝을 장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살롱은 쇼팽을 위한 공간이었다. 마치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 사람같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하루 저녁에 한 곳 이상의 살롱에 들렀고 어떤 때는 여러 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가 즐겨 찾은 살롱은 20개 내지 30개까지 되었다고 한다.
 
이 전에 얘기했다시피 큰 연주 홀에서는 쇼팽의 연주 음향이 묻히는 경향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소수의 낯익은 사람들이 모인 살롱에서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연주를 하는 것을 즐겼고, 그곳에서는 듣는 사람도 그의 음악의 미세한 울림까지 온전히 들을 수 있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스타는 저 멀리 무대 위에 있다. 하지만 살롱에서의 쇼팽은 손 뻗으면 닫을 수 있는 바로 옆의 친근한 사람이었다.
 
마리 다구(Marie d’Aguolt, 1805~1876) 백작 부인의 살롱도 리스트와 그녀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쇼팽에게는 중요했다. 그곳에서는 음악가, 시인 외에 정치가들도 자주 모였었고 쇼팽이 상드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 앞 편에서 언급했듯이 쇼팽과 리스트 사이에는 한 사건 때문에 균열이 생겼다. (본 시리즈 19편 참조)
 
그 균열은 쇼팽의 마음속에 리스트에 대한 거리감이 생겼다는 것이지 두 사람이 서로 대놓고 등을 돌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사이에 리스트의 연인 마리 다구 부인과, 쇼팽과 특별한 사이가 되는 조르주 상드가 등장하며 두 사람의 관계는 더 복잡해졌다. 이제 쇼팽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인인 조르주 상드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질 때가 되었다.
 


[출처 :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