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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III/Thinking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 2. 가족


가족은 인간의 탄생과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위입니다. 


가족은 보통 부부와 자녀로 구성되는데, 부부관계는 사회적 계약으로 연결되고, 부모 자녀 관계는 유전자의 유사성으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구성된 가족을 핵가족(nuclear family)이라고 하는데, 이는 산업혁명 이후로 서양의 보편적인 가족 형태일 뿐 아니라 한국에서 최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모델입니다.

사회적 계약이라는 인위적 장치로 연결되는 부부관계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느냐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존재합니다. "부부는 등 돌리면 남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부부관계가 별 의미가 없고, 따라서 이혼하고 나면 사회적 계약이 끝나기 때문에 부부관계도 사라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체 부부의 절반 이상이 결국은 이혼하는 선진국에는 부부관계의 청산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부부관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관계에 사회적 계약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기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창 2:24)라는 구절로 끝납니다. 이는 부부관계가 하늘로부터 온 절대적인 관계라는 뜻이죠. 플라톤의 향연(Symposium)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옛날 인간은 요즘 인간 둘을 합쳐 놓은 커다란 존재였습니다. 이 인간들은 힘이 셌기에 신에 대항하였고, 제우스신은 이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반으로 쪼개 놓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크기와 형태의 인간이 탄생한 것이죠. 이렇게 반으로 쪼개진 인간은 여전히 과거의 온전한 상태가 그리워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다니고, 결국 그 반쪽을 찾았을 때 다시 온전함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원인은 현실을 뛰어넘는 "운명" 때문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랑이 이처럼 운명에 기반을 둔다면, 사랑으로 결혼하는 부부도 단지 사회적 계약이 아닌 운명적 만남으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부부가 될 사람은 빨간 실로 엮여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역시 부부관계를 운명의 관점에서 본 예라고 하겠습니다.

가족의 또 다른 축인 부모 자녀관계는 부부관계보다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인간의 유전자는 영원히 세상에 존재하기 원하는 속성을 지닙니다. 이는 인간이 자손을 낳고, 자손이 다시 자손을 낳을 때 가능하죠. 


물론 이러한 "유전자 영생"이라는 목표는 자손을 낳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자손을 잘 돌볼 때 가능합니다. 만약 자손을 낳기만 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병들어 죽거나, 좋을 배우자를 구하지 못해 다음 세대를 생산하지 못하겠죠. 따라서, 인간은 자녀를 사랑하고 돌보려는 본성을 타고나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문화에 따라 자녀를 향한 사랑의 정도는 많이 다릅니다. 


유럽에서도 라틴계 부모가 게르만계 부모보다 자녀에 대한 사랑 표현에 훨씬 적극적입니다. 이러한 자녀 사랑의 표현 중 하나는 자녀가 성인이 된 후에도 자녀와 가까운 곳에 사는 풍습인데, 실제로 이탈리아 남성의 대부분은 결혼하고도 부모와 가까이 삽니다(My Big Fat Greek Wedding에서도 그리스계 아버지가 딸에게 집을 사줬는데, 알고 보니 그 집이 아버지 집 바로 옆집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한국도 과거에 모든 결혼한 아들이 부모와 함께 대가정을 이루고 살았고, 지금도 많은 부모는 자녀와 같이 살거나, 최소한 가까운 곳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에 비해 영미계, 게르만계에서는 자녀가 성장하고 나면 부모가 자발적으로 자녀와 거리를 둡니다. 시트콤 사인펠드에서도 조지 코스탄자의 부모가 조지와 거리를 두기 위해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모습이 나오고, 새라 제시카 파커와 매튜 맥커너히 주연의 달콤한 백수와 사랑 만들기(Failure to Launch)라는 영화에는 성인이 되고도 집을 떠나지 아들이 독립하도록 부모가 여자를 고용해 아들을 유혹하도록 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엔 "손주 봐주기가 싫어서 자녀를 멀리하려는" 노부모들이 늘었다는데, 이는 성인이 된 자녀와 거리를 두기 원하는 심리라는 점에서 영미, 또는 게르만계 부모들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은 크면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만약 부모와 자녀의 사랑이 지나치다면 자녀가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부모도 자녀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자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건강한 성인이 되지 못하고, 부모도 자녀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혼동해서 자녀의 인생에 사사건건 간섭하기 마련입니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자녀가 부모로부터 감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가정을 공생 가정(Symbiotic family)이라고 불렀고, 이를 비생산적인 가정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가 독립된 인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이들은 자녀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자녀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끼기에 자녀가 성공하도록 강한 압력을 가하겠죠. 


이러한 부모 밑에 사는 자녀는 자신이 부모의 삶까지 성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일반적인 모습이죠.

가족은 부부관계와 부모 자녀관계의 결합일 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가족과 함께 할 때 특별한 동질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은 여전히 내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귀중한 역할을 하죠. 문제는, 이렇게 내게 소중한 가족과 사회의 이익이 충돌할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무조건 가족의 이익을 위한다면 이는 가족 이기주의가 되고, 무조건 사회의 이익을 위한다면 매정한 사람이 되겠죠. 또한, 개인과 가족의 관계를 놓고 볼 때도 개인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가족을 저버리는 파렴치한 사람이 되겠지만, 자신의 이익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가족만 돌본다면 프롬이 말한 비생산적인 공생적 가족이 되고 말 가능성이 큽니다. 


이처럼 인간은 다양한 수준으로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느 공동체를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를 생각해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출처 : http://cimio.net/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