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2012년 그리고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것이다. 한국 정치와 2012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스토리는 별로 없다. “남의 나라 정치 얘기는 뭐하러 보나” 라고 한다면 글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한국에서 유행하는 소셜서비스가, 소셜 서비스를 활용하는 한국 정치가, 한국의 미디어가 “구리다”고 생각하면 한번 끝까지 읽어봐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2년은 미국 선거 역사를 바꾼 해로 기록된다. 계파 정치와 직감에 의한 선거 운동, TV 광고 등 전통적인 선거 운동 방식이 데이터 과학에 기반한 오바마식 ‘타깃 선거 운동’으로 바뀌었다. 이번 글은 오바마가 어떻게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스토리다.
오바마가 처음 대선에 나서기로 마음먹은 2007년으로 돌아가보자. 2012년 미 대선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2007년을 복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7년 2월. 마크 안드레센(Mark Andreessen) 안드레센-호로위츠(벤처캐피털) 대표는 버락 오바마 연방 상원의원을 만났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 업계에서는 오바마보다 마크 안드레센이 더 유명했다. 그는 인터넷 브라우저 넷스케이프의 창업자이자 소셜네트워크 서비스 페이스북과 HP의 이사다. 특히 넷스케이프 창업으로 인터넷 브라우징 시대를 연 선구자로 꼽힌다. 반면 오바마 당시 상원의원은 흑인 첫 상원의원(초선)으로 이제 갓 전국적 지명도를 갖춰가는 수준이었다.
당시 오바마 의원은 2008년 11월 치뤄지는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인 민주당 경선을 준비했다.
당시 오바마 의원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확률은 극히 적었다. 조지 W 부시의 실망감으로 민주당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지만 당시 민주당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힐러리 클린턴 의원과 2004년 대선 후보로 지명된 존 케리, 부통령 후보로 지명됐던 존 에드워즈 등 쟁쟁한 후보가 있었다.
오바마 의원은 마크 안드레센에게 물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민주당 경선에서 맞이할) 적들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되겠소?”
오바마 의원은 소셜네트워크가 엄청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지고 있고 데이터베이스를 개발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안드레센은 후에 이 장면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오바마는 정치인이 아니라 차고(garage)에서 성공스토리를 쓰기 시작한 여타 실리콘벨리 창업자처럼 보였다. 그가 하고자한 것은 당시로서 가능해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에야 해낼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는 정말 슈퍼 스마트했고 기업 창업가처럼 도전정신이 있었다”
마이너, 두번의 결정적 승리를 거머쥐다.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44대 대통령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흑인 재선 대통령이다. 재임중에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두번이나 이름을 올렸다.
그가 ‘변화(Change)’를 외치고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을 말하며 전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줬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 같은 상징성때문인가. 마이너 중에 마이너였던 그가 어떻게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두번이나 이겼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선거를 몇번 치루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두번에 걸친 결정적, 기적같은 승리를 거머줬다.그는 더이상 선거에 나갈일이 없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승리를 했는가에 대해 앞으로도 알려질 기회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의 ‘치적’과 ‘공과’에 대한 얘기만 나오지 그가 선거를 어떻게 ‘이겼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
오바마는 떠나면 그가 승리했던 비법도 떠난다. 미국 민주당 다른 후보가 나온다고 해도 오바마의 당선 공식을 그대로 전수할 수는 없다. 오바마의 당선 공식은 온전히 오바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소셜네트워크와 빅데이터 등을 이용해 정교한 승리를 거뒀다는 것은 두고두고 복기하고 남겨두고 배워야 한다.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정치 스스로 매크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양극화 된 정치 지형과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보급 등 급격한 사회변동 시대에는 마이크로 폴리틱스(미시 정치학)가 당락을 좌우한다. 오바마가 두번에 걸쳐 증명했다.
정치 초년생에 마이너, 더구나 대통령 이전에 계파(machine)도 없었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만들지 않았던 오바마는 어떻게 두번이나 대선에 승리할 수 있었을까?
오바마가 소셜 서비스와 데이터때문에 당선됐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소셜 서비스와 데이터를 활용할 줄 몰랐다면 승리할 수 없었다는 것은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오바마, 소셜의 위력을 ‘제대로’ 이해한 유일한 정치인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소셜 미디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방적 메시지 배포를 통한 ‘프로파간다’로 활용하거나 지지층을 결집하는 수준으로는 소셜 미디어는 ‘승리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프로파간다는 또 다른 안티-프로파간다를 낳게 된다. 소셜 미디어를 ‘유통채널’로 인식하는 것은 기존 올드 미디어(신문, 방송)와 같이 메시지 유통 창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한 일방적 메시지 배포가 효과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종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바마는 처음부터 달랐다. 선거 운동을 ‘스타트업’ 하듯 시작했다.
오바마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선거 승리의 결정적 도구로 활용해 승리한 첫 정치인으로 꼽힌다. 오바마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이 널리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계파가 없고 자금이 부족했던 그가 믿을만한 구석이라곤 20~30대 자발적인 힘을 가진 ‘풀뿌리’ 지지층밖에 없었고 SNS는 이들을 움직이는 도구가 됐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2008년 대선때 만들어진 사이트를 지금도 ‘지지자’들을 묶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의 SNS 활용은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다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그가 첫번째 대선에서 어떻게 승리했는가를 핵심만 복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오바마는 처음부터 인터넷을 온라인과 오프라인 선거 운동을 한데 묶는 도구로 활용했다.
-2008년 오바마 캠프는 오프라인 선거운동을 중심에 두고 온라인 전략을 부수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온라인’을 선거 운동의 중추신경과 같이 활용했다.
-오바마는 대선출마 발표 9일전인 2007년 2월 뉴미디어 업체 ‘블루스테이트디지털’과 계약을 맺고 온오프라인 통합 선거운동의 중추신경인 ‘마이버락오바마닷컴(일명 마이보)’을 구축했다.
-홈페이지를 홍보용 사이트로 만든게 아니라 유권자들이 서로 의견을 교감할 수 있는 SNS 사이트로 만들었고 페이스북, 트위터에도 연동시켜 퍼나르게 했다.
-소셜네트워크를 메시지를 확대하는 ‘미디어’로만 인식한 것이 아니라 지지층을 결집시켜 ‘총알’ 즉, 선거운동 자금을 모으는 통로로 활용했다. 그래서 오바마는 민주당 후보 경선직전 690만달러를 모금, 힐러리 클린턴(490만달러)를 압도했다. 이는 초반 열세를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됐다.
-실제로 ‘마이보’에 등록한 오바마 지지자들은 선거본부와 독자적으로 새 소식을 올렸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지역에서 지지 그룹을 만들어 이벤트를 조직하고 자금 모금 행사를 벌였다. 오바마는 ‘마이보’를 통해 200달러 미만 소액 지지자 200만명을 모았다.
2. 그는 2008년의 싸이였다 : 바이럴 위너(Viral Winner)
-오바마는 소셜의 ‘바이럴 효과’를 적극 활용했다. 당시 페이스북과 같은 SNS 사이트에서 대선을 앞두고 후보의 프로필을 요구했는데 오바마 캠프는 극각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자료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프라 윈프리보다 더 자주 관련 자료를 업데이트했다. 반면 존 매케인 당시 공화당 후보 캠프는 기존에 있는 자료만 형식적으로 보냈다.
-버락 오바마 공식 사이트(www.barackobama.com : 지금도 잘 활용된다)는 콘텐츠를 풍부하게 업데이트했다. 전화연결음, 비디오, 사진 등을 꾸준히 업데이트해서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방문을 유도했다.
-당시 오바마 캠프는 특정 계층으로부터 트래픽이 유입되는 사이트(블랙플레닛, 아시안에이브, 글리닷컴, 페이스베이스)를 집중 관리했다. 이들은 오바마의 캠페인 구호였던 ‘예스 위캔(Yes, We can)의 다양한 버전을 생산해내며 오바마의 인기를 증폭시켰다.
-인터넷 부문 참모간 역할 분담도 적절히 이뤄졌다.
3. SNS에서 투표하지 않는다. 투표는 투표장에서 한다
-오바마 캠프는 SNS나 온라인이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바마를 지지하는 메시지가 넘쳐난다고 해서 바로 ‘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오프라인에서 움직여야 효과가 있다.
-2008년 오바마 캠프는 이메일과 SNS 등을 활용, 정교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여러 선거구, 지역 현안에 대해 적절한 메시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면서 투표 참여 운동을 조직화하고 독려했다.
-SNS에서 정보를 흡수하고 메시지를 뿌리는 1차원적인 활동이 아니라 오바마를 위해 무엇인가 해줄 수 있는 사람을 끊임없이 고무하고 격려해 그들이 실질적으로 2~3명을 이끌고 투표장에 나갈 수 있도록 독려했다.
4. 유권자 데이터가 핵심인 것을 알고 있었다.
-오바마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순간 가장 먼저 한 일이 유권자의 데이터 베이스(DB)를 확보한 일이었다. ‘유권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그들에게 득표 행위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그는 온라인 사이트 운영과 선거 이벤트로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하고 이를 ‘보트 빌더(www.votebuilder.com)’라는 웹사이트에서 통합 관리했다.
-보트빌더는 2012년 대선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고 민주당의 핵심 자산이 됐다.
-보트빌더에서 확보한 자료는 *이름, 나이, 주소 등 유권자 등록 정보 *총기소유 면허증 정보 *정치 활동 기록 *신용카드 사용 명세 *대출 기록 *자주 방문하는 웹사이트 *페이스북 개인 기록 *구글플러스에 적힌 개인 취향 *트위터 사용 내역 *각종 마일리지 등이다.
-이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유권자를 정밀하게 분석, 타깃 마케팅을 할 수 있었다. 예를들어 투표 하루 전날 “투표하세요”라는 독려 전화도 오바마 캠프에서는 40대 여성이 좋아하는 남자 배우나 60대 할아버지가 신뢰하는 사람이 한다. 무작정 유명한 사람이라고 전화를 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5. SNS에 스토리를 입혔다
-오바마 캠프는 선거에서 정책이 중요하지만 유권자들은 정책만 보고 투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나를 케어해 줄 것 같은 후보’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SNS에 “오바마는 진솔하다. 그는 미국인들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메시지를 내용으로 하는 스토리를 지속적으로 남겼다.
-오바마 캠프가 온라인으로 많은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오프라인 인터뷰는 철저히 관리했다. 참모들은 오바마의 언론 인터뷰를 철저히 통제했으며 발언 하나 하나를 사전에 조율했다. 인화성 있는 발언으로 대사를 망칠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대처했다.
-오바마는 SNS에 귀를 기울였지만 맹목적인 추동도 하지 않았고 배타적인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2012년 미 대선. Beyond Social, Data Analytics
오바마는 자칭타칭 최초의 소셜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데이터 분석 선거’라는 새로운 구상을 가지고 선거라는 거대한 비즈니스에 CEO는 물론 CIO 역할까지 했다. 소셜을 한단계 진화시켜 정치에 적용, 최초의 흑인 재선대통령의 자리를 거머줬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오바마는 현직 대통령이었지만 여전히 백인, 동부 출신이 좌우하는 워싱턴 정계에서는 ‘마이너’였기 때문이다.
그는 메이저 계파에 속하지 않았고 만들지도 않았다. 대통령을 4년 이상했지만 여전히 계파정치를 싫어하는 것을 보면 뿌리부터 싫어한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그의 저서 ‘담대한 희망’에도 대통령이 되더라도 워싱턴 정계에 물들지 않겠다고 썼으며 실제 1기 백악관에서도 그렇게 행동했다. 이 같은 ‘탈 워싱턴’ 마인드는 지난 4년간 의회와의 불화를 낳았다.
오바마의 인지도와 인기에 비해 지난 4년간 “딱히 한게 없다. 리더십이 문제다. 경제를 못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은 워싱턴에서 인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오바마가 잘한 것도 없지만 특별히 못했다고 평가받기도 힘들다.
미국 중산층을 위한 건보개혁 법안을 통과시켰고 경제도 나빠졌지만 전임 조지 부시 대통령이 금융위기를 초래한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지난 4년간 의회와는 편하지 않았다. 공화당이 장악한 상하원과 다툼이 심했고 정부가 추진하던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오바마는 워싱턴 정계에서 ‘반드시’ 해야하는 ‘파티’도 즐겨하지 않았다. 보통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파티를 자주 열어야 했다. 미국에 얼마나 많은 산업과 이해관계가 있는가. 각 업계를 대표하는 인물을 백악관에 부르는 ‘자리’를 만들어서 정치 자금을 모금하는 것이 관례다. 워싱턴의 로비스트들이 법안 통과를 위해 작업을 하는 주요 장소도 이런 자리다.
하지만 오바마는 이런 것을 싫어했고 대통령이 되서도 즐겨하지 않았다.
워싱턴 정계에서는 ‘대화가 없는’ 오바마를 싫어했다. 정계 입장에서 보면 오바마는 대화가 잘 안되는데 이는 ‘리더십 부재’라는 말과 통했다. 딱히 오바마가 ‘깨끗해서’가 아니다. 그는 ‘워싱턴스러운’것을 너무 싫어했다.
그가 워싱턴 계파 눈치를 보고 파티를 열어 정치자금을 모금하는데 기웃거렸다면 지금처럼 ‘역사’가 되기는 커녕 연방 상원의원 재선에 신경쓰고 3선을 위해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흑인 첫 상원의원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첫 흑인대통령’ 후보로 언론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히스패닉 대통령이 언제 나오느냐는 전망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 오바마 대통령은 이미 ‘역사’가 됐고 4년 후에는 어떤 수식어를 앞에 붙일까 하는 일만 남았을 정도다.
오바마의 당선은 기적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재산은 ‘흑인 첫 상원의원’이라는 점과 ‘담대한 희망’ 등 그가 직접 저술한 책 두권 뿐이었다.
재선도 결코 쉽지 않았다. 대선 전에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박빙이 예상됐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예측과 상식을 뒤집은 완벽한 ‘압승’이었다.
어떻게 박빙을 압승으로 바꿔놓았을까?
오바마 캠프는 2008년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캠페인 센터 ‘마이보(mybarackobama.com)’를 2012년에 다시 가동시키는 것으로 선거 운동을 개시했다. 마이보를 통해 지지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개인 정보와 코멘트, 사진, 비디오 등을 올리도록 장려하고 선거 자금을 모았다.
마이보는 선거 운동의 시작이란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지자들이 콘텐츠를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오바마의 페이스북 페이지나 유튜브 채널 등을 연결하는 일종의 허브 역할을 하도록 했다.
반면 롬니 후보는 4년전 맥케인 후보에 비해서는 진일보했지만 오바마 후보의 당선 공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겉으로 따라하는데 그쳤다. 롬니 후보의 블로그에는 수사적인 문구가 포스팅 됐고 TV, 라디오나 신문 기사는 기존 지지자들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만한 것뿐이었다(선거 후에 공화당은 민주당의 선거 전략에 대한 컨퍼런스에서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선거였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 롬니측 “오바마 측에 한수 배웠다)
출처 : 손재권 기자의 점선잇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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