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한끼, 서울⑰ 중구 명동돈가스
◈ 명동돈가스-지도에서 보기 ◈
어려서, 돈까스가 좋은 줄 알았다. 보통 어린이는 돈까스를 좋아하니 나도 그런 일반적인 성장 과정을
밟는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가서는 제일 싼 단백질 공급원이 돈까스였다. 그래서 돈까스를 먹는다고 여겼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먹었지만 그 정도면 평균에 수렴한다고 여겼다.
군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입맛이 유아적으로 변하는 시기다. 초코파이도 없어서 못 먹는 군인에게
돈까스는 특식의 일부였다. 그래서 나는 돈까스가 메뉴인 날에는 굳이 두 덩이씩 먹었지만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돈까스를 좋아해야
하는 것은 군인이 지녀야 하는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돈까스를 좋아하지 않는 군인이란 초코파이를 마다하는 것과 비슷한
불경이었다.
그런데 군대를 다녀와서도 나의 취향이 바뀌지 않았다. 메뉴에 돈까스가 적혀 있으면 시키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명동에 가면 나는 ‘김유신의 백마’로 변했다. 이번에는 가지 말아야지라고 여러 번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나는 바람이 불면 날갯짓을 하는 새처럼, 지평선이 보이면 달리는 말처럼, 수학 문제가 보이면 풀고 마는 천재처럼 ‘명동돈가스’라는 간판이 보이면 그 문을 열고 만다.
명돈돈가스가 영업을 시작한 것은 1981년, 그 후로 서호돈까스와 함께 명동을 호랑이와 사자처럼 이분했던
것이 수십 년이었다. 서호돈까스 주인장이 이민을 갔다는 풍문이 들려오며 문을 닫은 후 돈까스 세계 유일 강자는 명돈돈가스로
정해진 것이 당연한 순리였다.
그러나 명동돈가스가 문을 닫고 리뉴얼에 들어간 것이 2년 전이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다. 어차피
리뉴얼이라는 것이 몇 개월이면 마무리 되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명돈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하루라도 빨리 문을 다시 여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이었다. 나는 문이 닫힌 명동돈가스 앞을 지날 때마다 공사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슬쩍 슬쩍 문틈을 엿보았다.
그러나 좌우 1.5 시력으로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1년이 지났다. 군대 갔다는 기사를 본 지가 언제인데 벌써 제대한다는 연예인 기사를 보듯 소리
소문 없이 명동돈가스가 새롭게 문을 열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옛날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문을 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변한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앞 뒤로 둘러쌓여 있었던 바 좌석이 한쪽이 막힌 긴 타원 형태로 바뀌었다는 이외에는 나의
높은 시력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사람도 그대로였다. 손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돼지고기에 빵가루를 묻혀 튀기던 안경 쓴 직원도, 그 뜨거운 돈까스를 썰던 팔목이 가는 직원도 여전했다.
내가 앉는 곳도 달라지지 않았다. 2, 3층에 걸쳐 좌석이 있지만 나는 오직 1층 바 좌석에 엉덩이를 뉘여야만 돈까스를 시킬 수 있는 마음이 들었다.
메뉴도 그대로다. 지방이 낀 등심을 쓴 로스까스, 기름기가 없는 안심을 쓴 히레까스, 튀김 옷 안에 치즈를 넣은 코돈부르, 통 새우를 튀긴 새우까스 등 비록 몇 안 되는 메뉴이지만 익숙한 이름에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는 없다.
맥주를 시키면 따로 나오는 양배추 채 접시 밑바닥이 흥건해질 정도로 참깨 소스를 뿌려 먹으면 입맛에
시동이 걸린다. 뒤이어 머리에 두건을 두른 아주머니가 작은 스테인레스 그릇에 얄팍하게 담긴 밥과 장국을 날라 오는 것은 이제
돈까스가 올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다.
바에 앉아 돈까스가 기름에 잠기었다 올라올 타이밍을 재어본다. 낮고 높은 온도에 나눠 두 번 튀기는 돈까스를 큰 칼로 경쾌하게 잘라 철망 위에 올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돈까스는 내 앞에 놓여있다. 부드러운 맛을 즐긴다면 안심, 기름지고 입에 길게 여운이 남는 것을 선호한다면 등심, 탱글한 새우살이 당긴다면 새우까스를 시킨다. 즉 기분 내키는대로 즐기는 것이 답이다.
기름기에 입맛이 둔탁해지면 얼음물에 담궈 바삭해진 양배추채를 한 입 먹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장국을 들이키고 하얀 밥으로 입 안을 닦는다. 바삭한 튀김옷이 이에 부딪혀 부서지고 그 뒤로 부드러운 살집이 씹힌다.
기름기가 혀에 닿고
조금 더 턱을 움직이면 살의 단맛이 과일을 씹은 것처럼 스며 나온다. 씹고 삼키고 씹고 삼키고 마시고 씹고 씹고 마신다. 빈
그릇을 앞에 둔 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행객이 빠진 명동 거리는 한산하고 밝은 불빛은 청승스럽다. 나는 슬프지도 울적하지도 않다. 이 집은 그대로일 것이고 나의 취향도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돈까스를 먹었고 배가 부르다.
[출처 : http://mediahub.seoul.go.kr/archives/1117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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