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한끼, 서울⑲ 경운동 간판없는 김치찌개집
난감한 질문이 있다. ‘첫사랑이 누구냐’, 혹은 ‘불을 보면 흥분되느냐’ 같은 것이 아니다. 전자는 ‘유치원 때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릴 수 있고, 후자는 ‘불을 발명한 호모 사피엔스라 불을 보면 당연히 흥분된다’고 둘러댈 수라도 있다.
이미 몇 차례 겪은 일인데도 매 번 난감하다. 이 질문을 받으면 어김없이 먼 산부터 쳐다보게 된다.
산이 없으면 지나가는 사람 뒤통수라도 쳐다본다. 바로 이것이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가요?”
그리하여 세상에 널리고 널린 음식들 이름을 하나둘씩 생각해본다. 돈까스, 떡볶이, 튀김, 스시, 감자튀김, 부르기뇽, 봉골레 스파게티… 그 이름은 윤동주 시인이 별 헤는 밤에 불러본 이름처럼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마련이다.
고를 수 있을까? 당연히 없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와 같은 우문이 아닐 수 없다. 무릇 때와
장소란 것이 있고 거기에 맞춰 어울리는 음식이 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기 보다 상황에 맞는 음식이 있을
뿐이다.
만약 내가 도쿄에 있다면 긴자의 스시집을 찾을 것이고, 그날 밤이면 라멘을 찾을 것이다. 파리에 있다면
당연히 바게트로 아침을 시작해 점심에는 푸아그라를 두부 썰 듯 뭉텅뭉텅 잘라 집어넣은 샐러드를 먹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것이다.
“가장 애틋한 음식은 무엇인가요?”
마음에 짠하게 남아 이따금 가슴을 울리는 음식,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놓는 음식을 떠올려본다. 그런 음식은
보통 화려하지 않다. 대신 질리도록 먹어서 몸에 인이 박힌 음식이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먹었다. 가장 값이 쌌고 흔했다.
바로 어묵을 넣은 김치찌개다.
부산에서 살던 시절, 어머니는 가장 싼 어묵을 가득 넣어 김치찌개를 끓였다. 부산에서는 흔한 조합이었고
나는 그 김치찌개와 어묵을 좋아했다. 질리지도 않았다. 동생과 어묵을 더 가져가려고 다투기도 많이 했다. 그러다 어른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서는 그 맛을 통 보지 못했다. 인사동에서 어묵 넣은 김치찌개를 보았을 때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이 집은 간판이 없다. ‘간판없는 김치찌개집’이라는 이름 아닌 이름이 있을 뿐이다. 인사동 어귀에서 장사를 한 지는 40여 년이 넘었다고 한다.
“저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바쁘게 쟁반을 나르는 아들은 가게 역사를 묻는 질문에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마흔이 넘었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에 가면 주방에서 손님이 받을 상을 차리는 할머니와 손님을 받는 아들, 그리고 나이든 할아버지가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손님들 행색을 살펴보면 옛 기억을 찾아 온 듯한 사람은 별로 없다. 하얀 셔츠와 H라인 스커트를 입은 직장인이 대다수다. 그들을 이 골목, 간판도 없는 곳에 모이게 하는 힘은 결국 김치찌개 맛이다.
일인분에 5,000원 하는 김치찌개에 어묵사리와 라면사리를 인수대로 시키는 것은 단골의 노하우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묵을 가득 쌓아 올린 김치찌개가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라간다. 라면은 살짝 초벌로 익혀 스테인레스 그릇에
담아낸다.
멸치 육수를 깐 김치찌개에 어묵을 넣고 차분히 끓이면 흐릿한 옛 기억이 되돌아오듯 조금씩 김이 올라오고 그
기운을 따라 냄비 안에서 도는 맛의 기운이 느껴진다. 두텁지 않고 맑은 김치 국물, 거기에 스며드는 바다의 감칠맛. 그 맛은
호화스럽지도 비싸지도 않은 김치와 어묵, 그리고 라면으로 완성된다.
꼬들꼬들한 라면을 한 젓가락 크게 떠 밥 위에 올리고, 살살 식혀가며 입 안에 욱여넣는다. 김치 국물에 젖은 밥을 한 숟가락 퍼 먹는다. 간간하고 신 김치찌개 국물이 입 속에 퍼지고 반사적으로 침이 퍼진다.
넉넉히 넣은 어묵도 국물에 불려가며 국자 째 퍼먹는다. 꼬릿하고 달달하고 탱글하다. 아마 조금더 국물에서 시간을 보내면 어린아이에게 먹일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워질 것이다.
끓이고 졸이고 퍼먹다보면 땀이 나고 배가 부르다. 배가 부르기 직전에 멈출 수 있는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집에 오면 배가 부르게 먹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옛날, 이 찌개를 입에 달고 살던 시절 습관이기에 그렇다. 제어할 수 없고, 잊혀지지도 않는 습관, 그 시절 기억. 나의 몸을 만들고 추억을 이룬, 어쩌면 나의 모든 것이다.
[출처 : http://mediahub.seoul.go.kr/archives/112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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