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cademy III/Thinking

인간의 조건 - 한나 아렌트

2차 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 대학살이 있었습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가둬 놓고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러나 나치는 독일 국민의 10%에 불과했는데 왜 90%의 독일 시민들은 홀로코스트를 막지 않았을까요?


전체주의란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을 근거로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통제하는 사상 및 그 체제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취재하러 예루살렘에 갑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특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됐습니다. 즉 아이히만의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단지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명령에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악이 평범하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근본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이었지만 계몽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한나에게 선생님이 반유태인적 발언을 하면 그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할 정도로 저항의식을 가르쳤습니다.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아렌트의 의식과 이에 따른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는 지성적 대결은 홀로코스트를 겪기도 전인 어린 시절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어린 한나는 그래서 친구들과의 놀이보다 책에 빠져들었습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강의하는 마르부르크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여기서 이미 기혼자였던 35세의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스승이자 연인이 되었습니다. 하이데거는 그녀의 사상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전체주의의 원인은 지극히 평범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근본악이 발현되었기 때문이고, 그 근본악의 원인은 사고력의 결여에 있었습니다. 전체주의는 정신적 차원에서의 ‘사유하지 않음’과 실천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행위능력의 상실’에 의해 야기되었습니다. 앞의 내용이 사유하지 않음에 대한 것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정치적 행위능력의 상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고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정치적 행위의 자율성을 상실하게 되었는데요. 고대에는 노동을 경멸하고 노예 따위나 하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노동을 노예한테 맡기고 확보한 자유시간에 정치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대 사람들은 노동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생산물을 주기 때문에 보편적 활동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유시간은 사적 영역에서 여가를 즐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적 영역의 확보가 노동의 목표가 되었고, 공적 영역의 정치적 행위는 등한시되었습니다.


근대사회의 기술적 발전 역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술발전으로 인한 노동의 종말을 경계했던 제레미 리프킨처럼 한나 아렌트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었습니다. 2차대전 중에는 전체주의와 근본악으로 나타났던 것들이 2차대전이 끝나고 난 후에는 기술적 전체주의와 기술의 근본악으로 다시 발현되었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아렌트는 “나치정권이 전체주의의 정치적 실험이었다면 과학적 전체주의는 이제 ‘전세계와 지구를 도구화’하고 있는 것이다.“라며 이러한 기술적 전체주의를 경계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근본악을 경험한 후에도 아모르 문디, 세계를 사랑하라고 말하며 공공성과 세계애를 강조했습니다.




1.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적 삶을 이루는 활동들을 노동, 작업, 행위 세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진대사와 세포분열 같은 활동이 있어야 생명이 있는 인간일 수 있겠죠? 그런 것처럼 우리가 살기위해 먹고 자고 입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노동입니다. 이렇게 노동은 자연의 필연성에 예속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생명만 유지한다면 하등생물과 차이가 없겠죠. 인간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의미를 찾습니다. 이러한 활동이 작업인데요. 자아실현과 꿈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작업은 최종 생산물이라는 목적이 있고 그것을 만들어내면 사라지기 때문에 도구성을 가집니다.


한편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가 있을 수 있는데요. 행위란 공동체 안에서 저마다 다른 타인과 소통하며 관계를 맺고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활동입니다. 행위는 노동의 필연성과 작업의 도구성을 뛰어넘어 서로 인간적 관계를 맺게 하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가장 강조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근대의 인간은 노동에만 몰두해 이웃과 공동체를 돌보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활동들에 대한 조건으로 또 생명, 세계성, 다원성이라는 세가지가 있는데요. 이게 제목에서 말하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인간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야 하고,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 영속적인 자신의 세계가 있어야 하고, 말과 행위를 통해 이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는 이렇게 짝지어집니다. 노동은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고 자연의 필연성에 예속되기 때문에 생명이 필요하고, 작업은 인간에게 비교적 영속적인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활동이기 때문에 세계성이 필요하고, 행위는 각자 다른 것들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동의 세계에 관해 논의하는 기초적 활동이므로 다원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 세계성, 다원성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인간실존의 가장 일반적인 조건은 탄생성과 사멸성입니다. 인간이 생명체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굳이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할 필요도 없으며, 필연적으로 죽지 않아도 된다면 굳이 영속적이고자 하는 작업이나 행위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탄생성과 사멸성은 인간이 유한한 지구에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따라서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조건입니다. 노동, 작업, 행위의 활동들과 생명, 세계성, 다원성이라는 실존조건들은 인간이 지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지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합니다.


전체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탄생성과 사멸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영구화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지구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실제로도 인간은 그러고 싶어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고 사적 영역만을 확보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활동적 삶’의 의미는 그리스어 ‘정치적 삶’이라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활동을 지칭했던 아스콜리아에 가깝습니다.


불멸성은 시간 안에서 영속하고 지상과 이 세계에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멸성은 반대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요. 인간은 사멸성이 있어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산출하기 위해 작업, 행위, 언어의 능력을 가짐으로써 불멸성을 획득합니다.




2.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모든 인간활동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에 의해 성립되는데요. 그 중에서도 인간사회를 벗어나서는 절대 불가능한 활동은 행위입니다. 노동이나 작업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는데 행위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히 동료와 함께 산다는 것은 동물도 똑같기 때문에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인간활동 중에서 정치적활동을 구성하는 요소 두가지는 행위와 언어입니다. 대부분의 정치적행위는 그것이 폭력의 영역이 아니라면 말을 통해 실행되며, 또 더 나아가서는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말을 발견하는 것이 행위라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한 경제에 관련된 것은 비정치적이고 가정사적입니다. 역사적으로 도시국가라는 공적 영역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의 희생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가정에서는 인간의 필요와 욕구에 의해 삶에 필수적인 것들을 공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성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정은 가장엄격한 불평등의 영역이죠.


반면에 폴리스의 영역은 자유롭지만 가정 영역에서 삶에 필수적인 것들이 충족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밥을 먹어야 자유도 추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가정생활은 폴리스에서의 좋은 삶을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좋은 삶이란 삶의 생물학적 필연성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삶입니다. 사생활이라는 단어 privacy의 어원은 박탈당한 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박탈되었냐 하면, 타인과의 관계와 그 관계로 하여금 얻을 수 있는 영속적인 세계의 박탈입니다.


이렇게 고대에는 사생활이 노예처럼 공론 영역에 들어갈 기회를 박탈당한 것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는데요. 근대에 사생활은 더 이상 박탈의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주의의 발달로 지켜져야 할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노동의 목적이 이러한 사적 영역, 여가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을 통해 획득하게 된 사적 영역은 인간 삶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에는 타자와의 소통과 정치적 행위가 필요합니다. 고대 폴리스에서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리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 전체의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였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고 결국 근대에는 사적 영역이 절대적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던 탁월성은 공론영역에서만 가능했습니다. 공론 영역에서 사람들은 타인을 능가하거나 타인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할 수 있었던 것이죠. 공론 영역은 인간이 탁월성을 발휘하는 데 적절한 장소입니다.




3. 노동


고대 폴리스에서는 노동을 경멸하고 정치적 활동이 짱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 필연적으로 수행하는 신체의 노동은 노예적이다”라고 하면서 인간이 삶의 필연성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노동을 해야 하고, 이 노동을 대신해줄 수 있는 노예를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예들은 노동을 함으로써 주인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여, 주인이 정치에 참여하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잠재적 생산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자연은 순환운동을 합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 역시 순환운동에 구속됩니다. 로크가 말한 생계유지의 필연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순환운동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노동과 소비라는 행위들이 반복됩니다. 노동과 삶의 관계는, 자연의 섭리인 순환운동 안에 노동이 있을 수밖에 없고, 삶은 그것은 늘 반복해야 한다는 지겨움과의 투쟁입니다.우리가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유는 생계유지를 위해 노동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에 치우쳐서 작업과 행위를 등한시하게 됩니다. 자신을 구분지을 탁월한 무언가를 세상에 남기는 대신 똑같은 생산물만 반복해서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노동의 도구가 개선되고 분업이 이루어지면서 노동은 이전보다 훨씬 덜 고통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삶의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우리를 생계유지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만들면서 삶의 필연성을 은폐하게 된 것인데요.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단순히 생산물을 얻어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수고와 고통이 자연적인 즐거움과 생명력과 활기를 주는 그런 노동이 올바르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술의 발전을 통해 잉여생산물이 많아져 인간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는데, 생산물이 너무 풍부해서 인간은 그것들을 빨리빨리 소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물들을 ‘사용’이 아니라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개개인에게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똑같이 반복되는 순환운동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소비 역시 지겨움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4. 작업


사용물은 적절히 사용하면 사라지지 않으며 세계에 지속성과 견고성을 부여합니다. 이런 지속성과 경고성이 없다면 인공세계는 불안정하게 되어 죽을 운명인 인간의 거처가 되지 못합니다.


인공 세계의 창조자인 제작인은 언제나 자연의 파괴자입니다. 신이 창조한 자연을 파괴함으로써만 인위적 세계는 건설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폭력의 경험은 인간의 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단순노동에서 경험하는 고통스럽고 힘이 빠지는 노고와는 정반대입니다. 견고성은 정직하게 일해서 자신의 생계비를 벌었을 때의 기쁨이나 기진맥진함의 결과물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한 결과입니다.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자'입니다. 도구는 노동과 소비과정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구체적 사물입니다. 도구와 기계의 근본적 차이는 인간이 기계에 ‘적응'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계가 인간의 ‘본질'에 조정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우리어진 끝없는 논의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납니다. 가장 쉽게, 가장 덜 인위적으로 기계화 될 수 있는 것이 노동과정의 리듬입니다. 기계로 생산을 계속하는 한, 기계의 과정은 육체의 리듬을 대체합니다.




5. 행위


사람은 말과 행위를 통하여 다른 사람과 단순히 다르다는 것을 넘어 능동적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합니다. 행위는 다른 행위에도 영향을 미치고, 관계를 확립하고, 예측불가능성을 상쇄시키는 데는 완전히 무기력합니다.


행위의 개념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개념은 모든 다른 요소를 희생하?고서라도 자기 현시를 감행할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예측불가능성이라는 난관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것은 고대 그리스 행위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너는 폴리스가 될 것이다."라는 말도 있었죠.


행위가 도구화되고 정치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그것들은 행위를 없애지도 못했고 행위가 중요한 인간경험의 하나가 되는 것을 막지도 못했으며 인간사의 영역에서 행위를 완전히 파괴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6. 활동적 삶과 근대


사람들은 지금 전지구적인 연속적 전체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가장 완전하게 연속적인 부분들의 인접성에도 내재하는 거리의 관념조차 속도의 노도 앞에 굴복합니다. 속도가 공간을 정복합니다. 그리고 한 신체가 다른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가 이 정복의 과정에 한계를 설정한다 할지라도, 이 과정은 거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듭니다. 왜냐하면 지구상의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몇 년, 몇 달 또는 몇 주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진실 할 수 있으며 신뢰할 만한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신뢰할 만하다는 태도와 유사합니다.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 속에 있어야 하며, 회의함으로써 발생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면 그것은 회의로부터 나와야만 합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더라도 적어도 회의한다는 것 자체는 확실하고 실재적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행위와 관조의 전도가 이전의 삶과 세계의 전도와 일치한다는 것이 모든 근대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활동적 삶은 관조적 삶내에서 자신의 준거점을 상실할 때에만 이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의 활동적 삶으로 됩니다. 그리고 활동적 삶은 자신의 유일한 준거점인 삶에 구속되어 있다는 오로지 이 이유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노동하는 신진대사인 삶 자체는 능동적으로 될 수 있고 자신의 완전한 다산성을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





"사유의 바람이 드러나는 건 지식이 아닙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아름다운 것과 못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유가 사람들에게 파국을 피할 수 있는 힘을 주기를 바랍니다."


- 영화 <한나 아렌트> 중에서



[출처]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작성자 강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