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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III/Thinking

봉건사회 2권

1장 - 사실상의 계급으로서의 귀족

 

 

1. 구혈통귀족의 소멸


봉건제와 귀족이라는 개념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여겨졌으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봉건사회가 결코 평등사회는 아니었으나 모든 지배층이 귀족이었던 것은 아니다. 귀족의 두 가지 특징은 귀족의 우월성을 실제로 확인시켜주는 고유의 법적 신분과 법적 신분의 영속적인 혈통에 의한 세습이다. 몇몇 신흥 가문도 이에 접근할 수는 있었지만 귀족이 되기 위해서는 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와 부의 세습 외에도 법적인 승인을 받아야 했다.


법률상의 특권이 사라진 민주주의에서조차 계급의식을 북돋워주는 것은 법률적 특권에 대한 기억이다. 그의 조상이 법적 특권을 행상하였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진정한 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의, 법률적 특권의 혈연적 계승자라는 의미의 귀족은 후기에 이르러서야 출현하여 12세기 이전에는 보이지도 않았으며 13세기가 되어서야 확립되었다.


게르만 민족들 내부에서도 몇몇 가문이 에델링게(edelinge)로 일컬어지며 귀족으로 공인받기는 하였다. 이들의 특권은 일반인보다 더 높은 인명배상금이다. 이들은 왕실에 세력을 넘겨주며 정치적 권력을 박탈당해갔다. 그래도 역시 이들은 신성한 혈족으로서의 위신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으나 만족 왕국시대를 넘어서까지 우월성을 지속시키지는 못했다. 이와 유사하게 원로원 신분에 의해 구성된 과두지배체제라는 것도 짜임새가 엉성하고 취약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신흥 왕국에서 더 이상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는데 자유인들 사이에 불평등을 유발한 계기는 부와 그에 수반되는 권력, 국왕에 대한 봉사가 그런 것들이다. 이것들이 대개 세속된 것은 사실이나 갑작스러운 상승이나 몰락의 여지는 충분했다.


봉건시대 1기의 가문들의 특징은 가계도가 짧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료가 빈곤하다는 것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9세기나 10세기의 문헌이 발견되면 얼마간의 가계도를 더 찾아낼 수도 있겠으나 전속 사가를 거느리고 있던 영주들의 가계도가 짧다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의 조상들에 대해 알려줄 수 없었다거나 말해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들보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아이슬란드 농민의 계보가 훨씬 자세하다. 그들의 조상에 대해 특별히 자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고 실제로 조상이 미천한 신분이었다거나 군소 영주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침묵의 주된 원인은 이 실력자들이 말 그대로의 귀족계급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은 계보를 일컫는 말인데 귀족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계보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은 것이다.


 


 

2. 봉건시대 제1기의 ‘귀족’이라는 말의 다양한 의미


그렇다고 9세기에서 11세기에 귀족(noble, 라틴어 nobilis)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법적 의미 없이 시시때때로 바뀌고 실제적인, 또는 여론상의 우월성을 지칭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이 ‘노빌리스’라는 낱말은 출생의 탁월성이라는 관념을 포함하나 부의 관념도 포함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주의 토지를 보유하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던 시절, 그런 종속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월의 징표였다. 따라서 자유토지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노블(noble) 이나 에델(edel) 칭호의 자격이 생기기도 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들과 관련된 문헌을 볼 때 이 칭호를 금방 포기하고 유력자의 토지 보유농이나 농노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귀족들은 실제로 상당히 미천한 출신이었고 그나마 11세기 말부터 거의 사라졌다. 이는 서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그와 같은 사회적 범주 자체가 단절되고 아예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프랑크 시대에 수많은 노예가 자유를 얻었다. 한 번도 예속의 낙인이 찍히지 않았던 가문의 사람들은 이들을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피해방민(libre, liber)으로 자유인(ingenu, ingenuus)과 대립 존재로 파악하였으나 퇴폐기의 라틴어에서는 거의 동의어로 취급되었다. 11세기초 이탈리아 문헌의 주석에는 예속된 적이 없는 가계의 일원을 귀족으로 분류하나 사회적 계급분류에 전환이 일어나자 이러한 분류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소작농 중 인신적인 자유를 지켜갈 수 있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 신분을 귀족이라 부르는 것은 이 시대의 관습에 모순되지 않았다. 몇몇 문헌에서 이 두 종류의 부류에 등가성을 인정하는 경향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들 자유농 중에는 토지를 보유함으로써 무겁고 굴욕적인 부역을 감당해야 했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귀족에 대한 세상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상반되었기에 여론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귀족과 자유인은 잠시 동일시되기도 하였으나 군사적 가신제 라는 종속관계를 나타내는 어휘를 제외하고는 소멸되었다.


그런데 가신의 충성의 의무는 농민이거나 가복같은 종속민과 달리 세습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봉사는 자유에 대한 정의와도 양립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영주의 복속인들 중 그들은 단연코 자유인 신분의 복속인(francs hommes)이었으며 이들의 봉토야말로 자유인 봉토로 불릴만했다. 나아가 이들은 통치귀족의 면모를 부여받게 됨으로써 고귀한 신분(noblesse)라고 불리며 다른 무리와 구별되었다.


봉건시대 제1기가 경과하면서 변변치 못한 신분층까지 포함하는 용법은 사라져갔다. 또한 사회 내에서 더욱 우월한 지위로 상승할 수 있었던 유력자 집단에 한해서 쓰이는 경향도 보이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신분의 규정과는 관계 없이 막연한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 그러나 1023년의 협약을 볼 때, 법적 계급으로서의 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용어의 의미를 조금 단순화시킨다면 이 시점부터는 귀족이라는 사회적 계급이 존재했고 귀족적 생활양식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3. 귀족계급, 영주계급


지배계급을 때로 토지 소유 계급이라고 일컬었는데 이 계급의 성원이 토지에 대한 지배권으로부터 수입을 이끌어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사실이다. 통행세나 시장세가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징적인 면모는 토지 경영 형태에 있었다. 그들의 수입은 항상 타인의 노동에 의지했으며 이는 바로 그들이 영주였다는 것이었고 이 사실에 의해 상층부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일부는 주인의 재산을 떼어받아 봉신이 된 무인의 자손이 분명했고 일반적이지는 못하나 일부는 부농을 조상으로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장원은 아주 오래된 제도이고 영주계급도 그만큼 오래된 것이다. 그들의 계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장원의 영주들과 보유지를 가진 민중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을 통해 서유럽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사회적 균열의 기준선 가운데 하나를 접하는 것은 가능하다.



4. 전사의 소명


장원의 보유야말로 귀족적이라고 인정받았는데 이는 타인에 대한 지배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유의 하나는 귀족의 소명 자체가 경제활동을 금하며 전사로서의 직무에만 전념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중세 귀족 형성에서 가신이 맡았던 역할을 설명할 수 있다. 중세 귀족이 전적으로 군사적 가신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다. 자유소유 장원의 영주들도 존재하였는데 때로는 봉신보다 강력하기도 했으므로 이들을 귀족대열에서 제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중세 귀족의 기본 요소는 가신집단이다. 앵글로 색슨의 어휘를 살펴보면 신성한 혈족으로서의 귀족이라는 낡은 개념으로부터 일정한 생활양식에 따라 형성되는 존재로서의 귀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투 능력과 의무가 있고 이를 즐겼던 사람들이 가신들 뿐만은 아니었다. 하층 계급의 무기 휴대를 제한, 금지하려는 노력이 12세기 후반 이전에는 없었다. 전투를 싫어하는 상인이라는 전통적인 유형은 정주 상업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흙 묻은 발’의 옛날식 방랑생활에 대립되는 존재였으며 빨라도 13세기에서야 출현했다.


일반인들의 무장과 관련해 말하자면 중세의 군대에서는 보병을 농민으로 충원하였다. 12세기부터 농민의 군역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군역 기간이 하루로 제한되는 경우가 빈번해짐에 따라 단순 치안업무에 국한되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같은 전환은 봉토에 부과된 봉사의무 자체가 경감된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때에도 창병이나 궁병은 농민의 자리였다. 농민병이 무용지물이 된 것은 용병이 모집됨에 따라서다. 그럼에도 봉건시대 제1기의 귀족은 임시고용 병사와 비교해볼 때 훨씬 우수한 무장을 갖춘 전사, 직업전사라는 점을 고유의 성격으로 지녔다.


귀족은 말을 타고 싸웠다. 하지만 기사를 기사이게끔 하는 것은 종자이다. 때로 부대 안에는 기사와 함께 하사(sergent)라 불리던 경기병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였다. 따라서 전사 계급 중 최고계급을 특징짓고 있던 징표는 군마와 완전무장, 이 두 가지의 결합이었다. 프랑크 시대 이후 장비가 발달하며 비싸지는 동시에 다루기도 어려워지는데 부자, 또는 그의 심복, 직업 전사가 아닌 한 이에 다가가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무기를 휴대하는 권리를 귀족계급이 독점하는 것은 실제적 필요에 따라 부과된 것이었으나 점차 법률상으로도 이런 규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군대의 본질적인 이중적인 구조를 생각해 볼 때 르 시드(le Cid)의 전기작가에 의하면, 이들이야 말로 진정 유일한 군사력이자 군대의 병력수를 헤아릴 때 애써 계산할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전쟁이 매일처럼 일어나는 문명권에 이보다 더 실감나는 대조란 있을 수 없었다.


가신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 있던 기사는 또한 귀족이라는 말과도 동의어가 되었다. 정 반대로 미천한 사람을 가리킬 때 쓰던 도보병사라는 경멸적인 명칭을 법률용어로까지 끌어올린 사료도 적지 않다.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힘을 극도로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던 시절, 뛰어난 전사에게 최고의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당시 이론에 따르면 인간 사회는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경작하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2 등급이 제3 등급보다 훨씬 높게 평가되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으나 서사시에 따르면 전사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훨씬 더 우월하게 여기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자존심이라는 것은 어떠한 계급의식에서도 본질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고 봉건시대 귀족의 자존심은 무엇보다 전사로서의 자존심이었다. 또한 전투는 그들에게 우발적인 의무만이 아니라 그들 생존의 이유 자체였다.

 

 

[출처 : http://blog.naver.com/istari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