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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III/Thinking

선거는 끝났다

제아무리 권위주의라도 한계는 있다. 권위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틀 안에서 생성되는 사조다. 그러니까 원리라는 게 있다. 무턱대고 하는 것 같지만, 이를테면 해경을 해체해 버린다거나, 결국 한계라는 게 있기 마련이고 그 안에서의 논리를 지켜야 한다.



파시즘은 관념 체계를 가진다. 사람이 아니라 관념이다. 탄돌이들이 대거 당선됐었던 2004년 총선을 제외하면 진보는 단 한 번도 다수를 점거해 본 적이 없다. 지방 선거에서는 노무현 서거 국면이었던 2010년에 다수를 점거했다. 사람이 죽거나 파탄이 나지 않고서는 이길 수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물 중심의 선거가 되면 성적이 훨씬 좋아진다. 이것은 자유주의가 권위주의와 싸우는 방식에서 도출되는 결과다. 국민들은 저 사람이라면 관념도 이길 수 있겠다 싶을 때, 표를 던진다. 웬만해서는 그런 인물이 되기가 어렵다.

 

손수조가 나와도 문재인과 맞짱을 뜰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손수조에게 투표하는 게 아니다. 권위주의에 투표하는 거다. 우리를 지금껏 다스려온 그 공포가 사회를 안정적으로 드라이브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 공포는 거대하고 단단하고 요동도 하지 않으니까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 권위가 그 사람을 인정했다면, 별 탈이 없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별 탈은 국가가 잘 운영된다는 뜻이 아니다. 권위주의가 나를 칼로 쑤셔대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권위가 손수조를 인정했다. 그러니 안심하고 찍는다. 국가야 어찌 되건 말건 나는 안전하니까.

 

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질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누구든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예상대로 우리는 졌다. 기초에서 졌다는 것은 총선에서 졌다는 말과 비슷하다. 광역에서 이긴 것은 박원순이 이긴 것이지 진보가 이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보수를 선택했고 사실 그동안 쭉 그렇게 선택해왔었고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 이번에는 노무현이 죽지도 않았고 탄핵이 되지도 않았고 갑자기 축소된 자유 때문에 내가 괴롭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뿐이다. 나는 이것이 감정이라고 보았고 사람들은 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내가 괴롭지 않으면 인간은 움직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는 그러하게 돌아갔다. 그러하게 돌아갔는데 생각을 못 했던 부분이 진보 교육감 대거 당선이다. 이건 정말 쓴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대목이다.

 

권위주의라는 것은 어떠한 풍경이다.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어떠한 마음속의 풍경을 크게 확장해 놓은 것이 권위주의고 파시즘이다. 이를테면 1kg짜리 쇠구슬과 솜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둘 다 1kg이니 무게는 서로 같다. 하지만 이미지는 쇠구슬이 더 무겁다. 이미지가 쇠구슬이 더 무겁기 때문에 애들한테 이걸 물어보면 대체적으로 쇠구슬이 더 무겁다고 대답한다. 1kg짜리 쇠구슬과 솜 중에 무엇이 더 무겁니? 음 쇠구슬이요.

 

현대사회에서 합리주의는 상당한 지분을 획득하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자 입장에서는 완전히 부족하다. 부족한데 중세 시대와 비교를 해 봐라. 중세였다면 경제부 장관도 교육부 장관도 문화부 장관도 신앙심이 얼마나 깊은지에 따라 직위가 결정됐을 것이다.


솔직히 이명박이 장로라고 뽑아버리는 요새 기독교인들하고 사고방식이 똑같다. 똑같은데 너네는 중세 시대 인간들이랑 수준이 똑같다고 하면 엄청 기분 나빠할 테니 이 부분은 대충 넘어가기로 하고 여하튼 요새의 사회는 시장 할머니들도 합리적인 사고에 대해 아는 세상이다. 범위는 다르지만 알기는 안다. 그 증거는 이를테면 경제부 장관을 임명할 때는 적어도 그 사람이 경제에 대해서 소양이 있어야 한다는 정도의 컨센서스가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버이연합이나 변희재도 이건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대놓는 말에서만큼은 그렇게 얘기할 거다.

 

그러니까 관료의 문제는 결국 합리주의로 귀결이 된다. 유능하고 합리적인 사람. 공정하고 깨끗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학생들에게로 확장이 되면 달라진다. 그러니까 시민이 시장에게 이거 왜 이렇게 합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학생이 선생에게 이거 왜 이렇게 합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 없는가. 합리주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학생들에 문제가 있다. 예전에 학생 인권 문제가 한창 대두됐을 때 교실이 난장판이 되는 와중에 이런 사태들이 많이 일어났다. 어떤 학생이 수업시간에 침을 뱉거나 다리를 올려놓고 노래를 부른다거나 애들을 쥐어 패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표현의 자유 아닌가요?


당연히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아닌데 애들은 그걸 구별을 못한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 자유주의는 대 혼란의 카오스와 연결이 된다. 사실 이 문제는 자유주의의 문제나 합리주의의 문제는 아니다. 아닌데 청소년 집단 구성원의 소양 부족이 결과적으로 사회 혼란을 만들어 내고 그 혼란을 목격하는 성인들도 사실 소양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겹치면서 자유주의 자체의 문제인 것처럼 인식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에 다리를 왜 놓아야 하는지는 물어볼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부모님께 왜 효도를 해야 하나요? 라고 물어본다면 일단 말문이 막혀버린다. 물론 나는 말문이 안 막힌다. 안 막히는데 내가 하는 설명을 학생들이 알아들을 수나 있을까? 사실 이런 식의 태도는 질문이나 궁금함이 아니다. 반항이다. 이제 막 사회 소양을 갖춰 나가는 나이에 가지는 막연한 불만과 불편함과 공격성이다.


여기에 자유주의가 첨가되면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어른들은 합리주의로 애들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부분의 명확한 한계점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만큼은 권위주의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 부분은 정의 관념과도 연계가 된다.


사회 비판은 정의롭다. 하지만 학생이 선생을 비판한다? 이건 싸가지가 없는 문제이다. 권위주의는 가장 바깥쪽의 사회 정의 부분부터 무너진다. 그러니까 가정적 권위주의다. 교육은 가정적 권위주의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합리주의로는 당최 질서가 잡힐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합리적인 관료는 지지할 수 있는 사람도 진보적 교육에는 불안감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이 있었던 것이 한국의 교육과 관련한 파시즘 정서 지형이었다. 그런데 이게 이번에 다른 문제가 터져버렸다.

 

5.18을 생각해본다. 5.18 같은 사건이 터지면 권력자는 가장 먼저 학생들부터 걱정한다. 학생들이 나오면 끝장이다. 더구나 고등학생 이하의 학생들이 죽어나가면 부담감이 배가 된다. 말하자면 이건 이렇다.


제아무리 자유가 좋다 한들 어린 것들이 어른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은 나쁘다. 나쁜데 제아무리 권력자라 한들 어린 것들을 밟아 죽이는 것도 나쁘다. 이것은 파시즘의 배경 감정 자체를 건드린다. 그러니까 풍경에 맞지를 않는다. 마치 사단장이 직접 주먹으로 이등병을 두들겨 패는 것과 같은 효과가 발생한다. 제아무리 사단장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행동에는 당연히 제약이 있다.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단장이 새파랗게 낮은 이등병을 직접 두들겨 패버리면 자유주의는 개나 주라고 생각하는 파시스트조차도 학을 떼게 되어있다. 그것은 권위주의 자체를 무너뜨리는 충격파를 만들어낸다. 이번 지방선거 국면에서 아이들과 관련한 권위주의의 풍경이 부서져버렸다.


세월호다. 세월호 문제가 터지고 나서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그것이 권위주의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르쇠를 떠는 사람도 사실은 알고 있다. 파시스트는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다. 닳고 닳아서 되는 게 파시스트다. 보통은 자유주의자들보다도 훨씬 권위의 전횡에 대해서 피해 감정을 가지고 있다. 전횡에 밟히고 밟혀서 굽어진 것이 파시스트니까. 말하자면 세월호 문제에서 박근혜 정부의 잘못을 말하는 사람이건 부정하는 사람이건 그게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의 문제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제아무리 권위주의라 한들. 애들을 죽일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세월호 사태는 커다란 이슈였다. 커다란 이슈였기 때문에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것에 대해서 말했다. 이것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자녀들과 연관 지어서 세월호를 생각했고 세월호를 생각하면서 잘못됨을 느꼈다. 잘못됨을 느꼈는데 그것은 그냥 느낌이다. 의식이 아니다. 나랏님이 울면서 고개를 조아리고 도와달라고 말한다. 역시 뭔가 잘못됨을 느낀다. 이것도 그냥 느낌이다.


이 부분은 당연히 더더욱 의식이 아니다.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은 두 가지의 감정이 마구 뒤섞여서 각자의 분출구를 찾아 연계된다. 세월호 문제는 사실 교육감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행정의 문제에 더 가깝다. 그런데도 아이들이라는 존재가 교육이라는 단어와 연계되고 이래서는 안된다는 감정이 불편함을 만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는 지켜져야 한다는 관념성이 길을 터서. 정치는 보수를 뽑고. 교육감은 진보를 뽑은 거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이 세월호를 잊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월호 문제는 노무현 서거보다 크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가 질 거라고 느꼈다. 그랬는데 의식이 아닌 감정이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 낸 거다. 사람들은 세월호를 잊었다. 잊기는 잊었는데 감정적으로는 뭔가 찝찝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없던 일로 치부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나는 이번에 교육감을 진보를 뽑겠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가 막힌 선택이다. 세월호의 구체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아무 생각이 없어야 그렇게 할 수 있으면서 세월호의 실체적 문제가 권위주의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이렇게 뽑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번에 진보 교육감을 뽑아낸 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다. 권위주의다. 파시즘이 진보 교육감을 소환한 거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을 짓밟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죄책감이 도와주십시오의 산하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대치를 뽑아낸 거다. 정치는 보수. 교육은 진보.

 

곽노현 효과가 남아있는 서울은 고승덕의 공이 컸다. 그밖에는 모두 세월호의 공이다. 경쟁교육에 지친 엄마들 좋아하네 아무거나 갖다 붙여놓은 분석이다. 엄마들이 갑자기 경쟁교육에 왜 지쳐. 고승덕 때문에 전국구에서 진보가 당선됐다는 것도 허황된 얘기다. 고승덕은 김용민이 아니며 진보는 보수가 아니다. 우리한테 언제부터 그 정도의 프레임 설정 능력이 있었지?


고승덕의 문제는 그냥 고승덕의 문제이고 고승덕의 문제는 서울의 문제이다. 고작 고승덕 하나로 전국 선거를 다 이길 수 있었다면 보수에서 이 정도의 사안이 터질 때마다 우리가 전부 다 이겨먹었을 거다. 아이고 생각만 해도 좋다만 그럴 리가 있나. 보수의 패륜 사건은 차고도 넘친다. 이 정도의 사안에도 고승덕은 24.3%를 찍어냈다.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정말로 기괴하다고 느낀다. 이렇게 해서 세월호는 날아갔다. 교육감이라도 뽑혔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모르겠다. 억울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사람들은 교육감 투표용지를 던지면서 세월호도 던져버렸다. 이 단일 이슈는 다시는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진상조사도 이제 끝장이다. 정권이 바뀌지 않은 한 세월호는 이 상태로 지리멸렬 조금씩 짓밟혀서 꺼질 것이다.


나는 이제 씻고 잘 거다. 아마도 쿨쿨 잘만 잘 건데 피해 가족들에게 남은 것은 한도 없이 길고 긴 불면의 날들과 진보 교육감뿐이다. 나는 그것을 나눠지지 못한다. 당사자의 심정은 당사자의 것이니까. 나의 이입 감정도 당사자의 체험 감정에 비하면 그냥 사치일 뿐이다. 이러한 것들은 말이나 글로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다. 해결도 안 될 것을 굳이 타닥타닥 적고 있다. 사치다.



[출처 : http://diversity.co.kr/4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