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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III/Thinking

一期一會 奇貨可居 (일기일회 기화가거)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 여(呂)씨가 불위에게


① 일기일회 기화가거(一期一會 奇貨可居) – 평생 한 번 오는 기회, 진귀한 보배(사람)는 마땅히 사둘만하다(<사기>)


[한자 풀이] 一 한 일,  期 기약할(일평생) 기, 會 기회 회, 奇 진귀할 기, 貨 재물 화, 可 마땅할 가, 居 살 거


살다 보면 어떤 일은 내 능력 밖이라는 것을 절로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능력 밖, 즉 부족함이 누군가와 기막힌 만남으로 한순간에 채워지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스승이나 군주(주인), 선배 혹은 친구일 수 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성장한다. 누구를 만나지 않고서는 부족함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러한 만남은 ‘평생에 한 번 오는 기회(一期一會)’일지도 모른다. 또한 상대는 내게  ‘진귀한 보배(奇貨可居)’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여(呂)씨는 불위(不韋, ?~BC 235)의 아버지를 말한다. 이름을 알 수 없다. 기록에 없기 때문이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인 신분이었다는 정도다. 그러니까 불위는 대를 이어서 상인의 길을 걸은 셈인데 아버지 여씨보다도 더 큰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사기열전>에 등장하는 ‘여불위열전’의 첫 문장이다.

 

呂不韋者 陽翟大賈人也 往來販賤賣貴 家累千金

(여불위자 양책대고인야 왕래판천매귀 가루천금)

 

“여불위는 양책의 큰 상인이었다. (제후국들)을 왕래하면서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집안에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라는 뜻이다.


양책(陽翟)은 중국 제후국 중 하나인 한(韓)나라의 도시 이름이다. 이곳에 여불위가 사업의 터전을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는 전국(戰國)시대의 말기로 전국 7웅인 한(韓)·위(魏)·조(趙)·제(齊)·주(秦)·초(楚)·연(燕)이 천하 패권을 놓고 자주 전쟁을 벌이던 때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 보자면 중앙에는 한·위·조 세 나라가 서로 이웃하고 있었고, 동쪽엔 제, 서쪽엔 진, 남쪽엔 초, 북쪽엔 연이 제후국이 되어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서·남·북의 변방도시보다는 아무래도 중앙에 위치한 한·위·조의 도시들이 좀 더 번화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은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한단성은 웅장했으며 그 구조 또한 빈틈없었다. 당시 각국의 왕궁에는 왕성(王城)과 동서 양편의 성들을 연결하면서 몇 대의 마차가 동시에 다닐 만한 큰 도로가 없었는데, 한단에는 그러한 길이 몇 개나 되었다. 길가에는 점포들과 여관, 주막이 빽빽하게 들어섰고, 행상과 노점상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단성 안에는 마차와 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빼어난 미모의 여인들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다른 도시 여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소박하고 검소한 면은 찾아볼 수 없었고, 매우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듯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그야말로 부귀와 향락이었다.(장옥빈·이붕 지음, 백은경·이진 옮김, <재기>, 고수 펴냄)


 

여씨 부자, 전 재산 털어 볼모 자초를 사다


처음 한단을 방문한 여불위에게 한단은 쓸모와 매력이 넘치는 도시였고 반드시 거래를 터야만 하는 요지였다. 하지만 대상인의 예리한 안목으로 여러 물건을 살피고 저울질해보았지만 큰 이문을 남길 만한 것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몹시 어려웠다. 현실적으로 계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상품의 물건이 도시에 차고 넘쳐났으나 그만큼 값도 최고로 비쌌다.


이러한 까닭에 여씨 상가(商家)의 원칙인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에 합당한 상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신규 거래처를 틀 수 없었다. 괜스레 발품만 판 꼴이 된 여불위의 한단행(行) 시장조사는 말짱 도루묵이 될 판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진나라의 왕자 중에 ‘자초(子楚)’가 조나라의 볼모가 되어 지금 한단에서 살고 있다는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기에 이른다. 매우 기쁜 나머지 여불위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진귀한 물건(보배)이다. 마땅히 사두는 것이 좋으리라(此奇貨可居也).”


한달음에 한단에서 양책으로 돌아온 여불위는 아버지를 찾아가 물었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기 위해 봄에 씨앗을 뿌려 밭에 나가 일하면 몇 배의 이문을 남길 수 있을까요?”

“아마 10배쯤은 되겠지.”

“진주나 옥과 같이 귀한 물건들을 팔면 몇 배의 이문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100배는 될 게다.”

“그럼 나라를 세우게 도와준 다음, 그 나라의 군주를 사 온다면 몇 배쯤 벌어들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아버지 여씨는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부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이문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평생 한 번 오는 기회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진귀한 물건은 마땅히 사둘 만한 것이다.”


여불위 아버지의 말을 여덟 글자(八字)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기일회 기화가거(一期一會奇貨可居)’. 팔자의 뜻은 ‘평생 한 번 오는 기회, 진귀한 보배(사람)는 마땅히 사둘 만하다’로 풀이할 수 있다.


당시 여씨 부자의 재산은 ‘천금’이었다. ‘천금’은 큰 액수의 돈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다음과 같이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1금은 10냥이고, 당시 금 한 냥은 16g이었다. 따라서 천금은 황금 160㎏을 말한다. 장사 밑천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천금’을 여씨 상가는 이제 어디에다 써야 할지, 긴 안목을 가지고서 결정한 것이다.


투자처가 결정됐다. 여불위는 천금을 가지고 다시 한단으로 향한다.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는 진나라 왕자 자초를 만나 약속을 받기 위해서다.



여불위, 자초에게 올인하다


자초는 진나라 소왕(昭王)의 손자였다. 소왕의 둘째 아들인 안국군(安國君)의 20명 아들 중에 둘째였다. 소왕 40년, 진나라 태자가 죽었다. 2년 뒤인 42년, 안국군이 왕위 계승자가 되어 진나라 태자에 올랐다. 이 해에 여불위가 한단을 처음 방문했고 자초 소식을 접한 것이다.


자초가 인질이 된 시기는 소왕 37년이다. 37년에는 진나라와 조나라가 한판 전쟁을 치렀다. 결과는 조나라의 승리였다. 진나라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왕자 중에 한 명을 인질로 보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자초가 인질로 결정되고 조나라 수도 한단에 남게 된 것이다. 자초는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타국의 볼모가 된 처지라 생활이 넉넉지 않았다. 궁핍했다.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무런 기약도 없었기에 뜻을 잃고 하루하루 살 수밖에 없었다.


자초가 한단에 머문 지 6년째 되는 어느 날이었다. 여불위가 방문했다. 뜻밖에 찾아온 손님이었다. 할 수 없어 자초는 여불위를 만났다. 자초를 만난 여불위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가문을 크게 해줄 수 있습니다(吾能大子之門).”


그러자 자초는 웃으면서 말했다(子楚笑曰).


“먼저 그대의 가문을 크게 이루고 나서 내 가문을 크게 이루어주시오(且自大君之門, 而乃大吾門).”

여불위는 솔직히 말했다. ‘我’라고 쓰지 않고 ‘吾’라고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뜻을 잃은 볼모 왕자는 상대의 말이 얼토당토않고 터무니없이 들렸기에 그저 허허, 웃을 수밖에(笑) 없었다. 그런 다음에 여불위에게 바로 비꼬듯이 말(且自大君之門, 而乃大吾門)한 것이다. 그러자 여불위는 자초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인다. 되새김질해야 하는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이 그것이다.


자부지야(子不知也) 오문대자문이대(吾門待子門而大)


“그대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내 가문은 그대의 가문이 커짐에 따라서 커짐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자초는 곧 여불위의 말뜻을 알아차린다. 형식적인 말로 오갈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비밀한 말을 나누기 적당한 장소로 이내 손님을 안내한다. 이윽고 함께 좌정한다(子楚心知所謂, 乃引與坐). 다시 말해서 마루에서 서서 손님을 맞이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방(안방)으로 들어갔다는 얘기다.



② 일기일회 기화가거(一期一會 奇貨可居) – 평생 한 번 오는 기회, 진귀한 보배(사람)는 마땅히 사둘만하다(<사기>)


[한자 풀이] 一 한 일,  期 기약할(일평생) 기, 會 기회 회, 奇 진귀할 기, 貨 재물 화, 可 마땅할 가, 居 살 거

 

가끔 서가에서 <사기열전>을 꺼내서 읽는다. 그러다 멋대로 “만약에~?”라는 질문을 ‘한 줄의 글’을 읽으면서도 묻곤 한다. 이를테면 ‘여불위열전’과 전국 사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만일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또한 3000명 식객을 거느렸다는 제후국의 사공자들(맹상군·신릉군·평원군·춘신군)이 동시대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과연 전국시대의 결말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결론은 이렇다. 사공자들이 없고 소왕이 더 오래 살았다면 중국 천하는 진시황제의 증조부가 되는 소왕이 통일을 했지 싶다.

 

지 난 호에서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한(韓)나라 거상(巨商)인 여불위가 조(趙)나라 수도 한단(邯鄲)에 볼모로 잡혀 있던 진(秦)나라 왕자 자초를 찾아갔다는 얘기를 했다. 가문을 크게 키워주겠다는 여불위의 제안을 처음엔 터무니없는 얘기로 치부하던 자초도 여불위의 속뜻을 간파하고는 안방에서 독대하기에 이른다.

여불위가 먼저 입을 뗐다.


“진나라 왕은 이미 늙었고 안국군이 태자가 되었는데 듣기로는 안국군은 화양부인을 총애한다 합니다. 그러나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누군가를 뒤를 잇도록 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화양부인의 마음 하나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 그대의 형제는 20여 명이나 되는데, 그대는 둘째 아들이며 또 그리 귀함을 받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다른 제후 나라에 볼모로 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돌아가시고 안국군이 즉위하게 되면 그대는 아무래도 그대의 형 또는 조석으로 안국군의 슬하에 있는 아우들과 태자의 자리를 놓고 싸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秦王老矣, 安國君得爲太子. 竊問安國君愛幸華陽夫人, 華陽夫人無子, 能立適嗣者獨華陽夫人耳. 今子兄弟二十餘人, 子又居中, 不甚見幸, 久質諸侯. 則大王薨, 安國君立爲王, 則子毋幾得與長子及諸子旦暮在前者爭爲太子矣.(사마천 지음, 임동석 역주, <사기열전>, 동서문화사 펴냄)


날카로운 분석이다. 훔쳐 들었다(竊問)는 정보 치고는 말이다. 진나라 왕궁의 돌아가는 내부 사정을 장사꾼에 불과한 여불위가 정확히 꿰뚫고 있어서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인질 왕자로 살아온 자초는 한편 놀라면서도 여불위의 식견에 신뢰를 보내며 경청해야 했다.

여불위의 말이 끝나자 자초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습니다(然). 이제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爲之奈何)?”

모든 사실을 자초가 스스럼없이 인정하자 여불위는 이어서 말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대는 가난하고 조나라에 볼모가 되어 있는 몸이어서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도, 빈객과 교제하는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비록 가난하지만 청컨대 천금을 던져 그대를 위해 서쪽 진나라로 가서 안국군과 화양부인에게 가까이하여 그대를 후사로 정하도록 주선하겠습니다.”


子貧, 客於此, 非有以奉獻於親及結賓客也. 不韋雖貧, 請以千金爲子西遊, 事安國君及華陽夫人, 立子爲適嗣.(사마천 지음 <사기열전>)



‘미래 이익’ 위해 손잡다


참으로 놀라운 책략이다. 게다가 여불위로서는 가장 큰 투자인 셈이다.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천금을 자초로 하여금 적통을 잇는 것(適嗣)에 모두 쓰겠다고 하니 말이다. 여불위의 말처럼, 진왕이 늙었고, 안국군이 태자가 된 것은 사실이고 화양부인에게 아들이 없는 것 등이 모두 정확한 사실이지만 아직 진 소왕은 죽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자초가 꼭 적통을 잇는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이익을 위해서 과감하게 천금을 던지겠다고 하니 자초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절로 고개를 숙일밖에….

하여 자초는 여불위에게 머리를 숙인다(子楚乃頓首). 돈수(頓首)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하는 절’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왕자가 일개 상인에게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는 얘기다.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랬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다. 이름도 없고 돈도 없이 외국 땅에서 볼모로 늙어 죽을 팔자가 하루아침에 조국에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생기고 게다가 진왕이 될 수 있는 꿈도 꾸게 되었고 뜻도 펼치게 되었으니 오죽 좋았겠는가. 어떻게든 여불위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가. 자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필여군책(必如君策) 청득분진국여군공지(請得分秦國與君共之)

“당신(君)의 책략과 같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면, 당신과 함께 진나라를 나누는 것을 청하겠습니다.”


여불위가 약속을 받아내고 싶었던 말을 자초가 결국 약속을 하고 만 것이다. 서로의 미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한단에서 여불위와 자초가 처음 만나 약속을 하던 이때가 진나라 소왕 42년이고, 그로부터 14년 뒤에 진나라 소왕은 즉위 56년 만에 숨을 거뒀다. 곧바로 태자 안국군이 왕위에 올라 효문왕(孝文王)이 되었다. 효문왕은 보위 1년 만에 죽었다.


드디어 자초가 진나라 왕으로 즉위하기에 이른다. 바로 장양왕(莊襄王)이다. 장양왕은 즉위하자마자 여불위를 승상에 앉혔다. 또한 문신후(文信侯)라 봉했다. 이뿐만 아니다. 전에 약속한 바와 같이, 하남 낙양에 10만 호를 여불위의 식읍으로 주었다. 이는 여불위가 처음 천금을 투자한 지 15년 뒤에나 거둔 결실이다. 여씨 상가로서는 최고의 거래가 된 셈이다. 가장 큰 이익을 남긴 거다. 굳이 이익을 따지자면, 천금의 1000배 이상 되는 부를 일궜다고 해야 맞는 얘기다.


하지만 지난 15년 동안, 천금을 쌓아두었다는 여씨 상가는 사라져버렸고, 절호의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적지 않게 여불위가 마음고생을 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란 인내심을 가지고 때가 오길, 묵묵히 기다릴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이 여불위의 놀라운 상술이다. 보통의 상인처럼 당장의 이익을 창출하는 현재의 투자에만 골몰하지 않고 언제 회수하게 될지 잘 모르는 일이지만 미래를 위한 과감한 투자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여불위는 대상인이다. 대상인의 능력과 마인드, 기질과 배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정말 남다른 투자였으리라.



여불위의 선견지명 책략


여불위는 자초에게 500금을 주었다. 빈객과의 교제비용과 곤궁한 살림에 보태라는 뜻에서였다. 나머지 500금을 가지고 여불위는 서쪽 진나라로 향했다. 진나라에 도착한 여불위는 먼저 화양부인의 언니를 만났다.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준비한 진기한 물건과 노리개를 선물로 바쳤다. 화양부인의 언니를 통해서 왕궁에 있는 화양부인을 만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많은 재물을 쓴 덕분에 화양부인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어느 정도 허물이 없어지자 여불위는 화양부인에게 자초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예를 들면, 자초가 어질고 지혜롭다는 이야기와 함께 태자(안국군)와 화양부인을 하늘처럼 우러러 받들고 있다는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화양부인의 언니를 설득해 화양부인의 약점을 파고들게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여자는 젊음이 시들고 매력도 시들면,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합니다(色衰而愛弛).”

이 말에 화양부인은 마음이 흔들렸다. 맞는 얘기가 아니던가. 그렇지 않아도 아들을 낳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늘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가 찾아와서 기름에 불을 붙이는 꼴로 아픈 곳을 찌르며 말하니 흔들리고 마음이 불안해지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효성이 깊은 왕자 중에 한 사람을 골라 양자로 들여야만 남편이 살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설사 죽은 뒤에도 양자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으므로 차후에도 탄탄한 앞날이 보장될 수 있다는 말에 설득되고 말았다. 그 말이 화양부인은 옳다 싶었다.


문제는 20여 명의 왕자 중에 누구를 골라 양자로 삼느냐였다. 여불위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자초를 추천했다. 비록 자초의 생모가 살아있지만 일찍이 총애를 잃어 화양부인과 다투지 못한다는 점과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점이 태자를 설득해 자초를 양자로 삼기에는 제법 그럴듯하다 싶었다. 화양부인은 기회를 엿보아 안국군을 설득하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긴다. 실행의 가닥은 자식이 없는 소첩이 한 가지 소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즉, 자초를 양자로 삼아 소첩의 장래를 의탁할 수 있도록 윤허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안국군은 자식이 없는 화양부인의 양자 입적 소원을 허락했다. 여불위의 책략이 그대로 먹힌 것이다. 그 증표로 옥부가 새겨졌다. 또한 안국군과 화양부인이 자초에게 내리는 옥부와 후한 선물이 조나라 한단에도 전해졌다. 이 심부름을 여불위가 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리하여 자초는 조나라와 제후국에서 명성이 높아졌다. 더불어 조나라 사람들의 대우도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여불위는 자초와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한단에 머물기 시작했다. 자초의 뒤를 돌봐주기 위해서였다. 여불위는 한단에 있는 여러 무희 가운데 용모도 뛰어나고 춤도 잘 추는 여자를 첩으로 들여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자초가 여불위의 집을 방문했다. 자초는 여불위의 첩을 보고 그만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러고는 거리낌도 없이 첩을 주었으면 했다. 여불위는 화가 났다. 하지만 자초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어 첩을 자초에게 바쳤다. 자초는 첩을 부인으로 맞았다. 첩은 여불위와 동거하며 임신한 사실을 숨겼다. 이를 여불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래를 위해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한단 무희가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을 정(政)이라고 지었다. 정(政)이 누군가. 바로 훗날에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진시황제(秦始皇帝)다.



[출처 : http://www.econovill.com/archives/204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