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 맛있는 한끼, 서울⑫ 연남동 중화복춘
◈ 중화복추-지도에서 보기 ◈
웬만한 중국집에 가면 시킬 수 있는 메뉴가 십여 가지가 넘는다. 양장피, 탕수육, 팔보채…. 그러나 그 메뉴를 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집을 가든 메뉴가 같기 때문이다. 맛의 변화는 미묘하다. 조금 더 달고 조금 더 짜다. 여기에 예전에는 천대받던 불맛이란 유행이 껴얹어지면 현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패셔너블한 중식이 완성된다.
하지만 그 변주 폭은 여전히 좁다. 이유를 찾자면 여럿이다. 우선 대중 입맛은 보수적이다. 이 나라에 들어온 지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는 이른바 중화요리는 된장찌개, 김치찌개와 같이 ‘이래야만 한다’는 어떤 맛의 규범을 가지게 되었다. 대중 기호와 시대 흐름에 따라 중식 맛은 가다듬어졌다. 일본인이 카레를 소울푸드로 여기듯 한국인은 짜장면을 먹는다.
그렇게 우리는 추억을 얻었지만 잃은 것도 있다. 새로운 중식에 대한 거부감이다. 중국 대륙의 거대한 미식 스펙트럼은 한국에 와서 짜장면과 짬뽕으로 귀결될 뿐이다. 섬세한 딤섬은 그저 만두의 일종일 뿐이고 양고기와 향신료를 듬뿍 쓰는 중국 동북의 요리는 100만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이제서야 조금씩 세력을 넓혀나가고 있는 형편이다. 나는 일주일에 한번 짜장면 먹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일년 내내 짜장면만 먹어야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불행일 것이다.
홍대 입구가 아닌 연남동이라고 불리길 원하는 서울의 가장 뜨거운 거리, 그 한편에 있는 중식당 ‘중화복춘’은 짜장면을 팔지만 그것에 짜장면이란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반지하에 자리 잡은 이 중식당에 눈 밝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들은 단골을 자청한다. 그 이유를 알려면 역시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펼쳐 보는 것이 첫째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여름’, ‘입추’ 등 코스 메뉴를 새롭게 짜는 것만 보아도 이 집의 욕심이 작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스러운 글자체와 검정과 빨강으로 강약을 조절해 메뉴를 적어놓은 디테일에 쉽게 감동받는 것은 이 나라에서 내가 가지는 음식점에 대한 기대치가 낮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이 집이 특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렵사리 예약한 자리에 앉으며 그 기대치는 한껏 올라갔다. 예약자의 이름을 적어 액자에 꽂아 탁자에 올려둔 것을 보았을 때 먹지 않아도 이미 기분이 좋았다. 코스의 하나인 식전주는 홍삼 당귀주와 메실 사이다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데, 이 날은 가볍게 매실 사이다로 시작했다. 달지만 시큼한 메실향이 입맛을 쉽게 돋구었다.
다음 접시는 은이버섯, 죽생버섯, 건해삼이 들어간 ‘해삼한방버섯 수프’였다. 큰 접시에 얕게 깔려 나온 이 수프를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이른 아침, 이슬이 낀 가을 숲에 들어간 듯 기운이 새로워졌다. 무엇보다 이제껏 한국의 중식에 느껴보지 못한 칩염수림 향이 콧속에 들어왔을 때 새로운 나라에 첫발을 내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다음은 ‘자연송이 일품관자찜’. 가을을 상징하는 송이버섯이 위에 올라가고 살이 오른 관자가 그 밑에 자리한 이 요리 포인트는 상큼한 호부추였다. 기온은 싸늘히 내려가지만 여전히 푸른빛이 형형한 호부추의 푸른 줄기와 두터운 땅을 뚫고 올라온 송이버섯이 겨루듯 각각의 맛과 향을 뿜어냈다. 밑에 간간한 맛을 내며 깔린 소스는 그 모두를 어우르는 땅과 같았다.
다음 코스는 ‘복춘 렁챠이’로 모둠 냉채였다. 접시 위에 수평으로 냉채를 나눠주는 다른 집들과 달리 중화복춘에서는 마치 이 그 자체가 하나의 요리라고 웅변하듯 수직으로 냉채를 쌓아냈다. 그 모두가 각각의 맛을 가졌지만 접시를 비웠을 때는 하나의 기억만 남았다.
다음 차례는 ‘목화솜 새우 요리’였다. 이 집에 유명세를 안긴 메뉴로 깐쇼새우와 크림새우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우리가 선택한 크림새우는 시큼한 크림소스를 깔고 그 위에 생크림을 올렸다. 새우는 알이 커서 하나만 먹어도 양이 모자르지 않았다.
이 집을 알리는 메뉴 중 하나인 쑤저우 식 ‘동파육’이 뒤를 이었다. 연잎으로 쩌냈다는 이 동파육은 살이 아예 녹아내려 식감을 느낄 수 없는 종류가 아니었다. 대신 적절히 조직감이 살아 있어 씹는 맛이 있고 베인 간과 향도 남달랐다.
식사로는 ‘차오판’이라는 볶음밥, 복춘탕면, ‘천면장면’이란 이름을 붙인 짜장면, 그리고 여향가지회반, 짬뽕인 ‘초마’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우리가 고른 여향가지회반, 즉 덮밥의 맛도 남달랐다. 단맛이 주를 이루긴 했지만 그 위로 알싸한 매운맛과 날카롭게 혀를 자극해 배가 부른 와중에도 그릇을 물릴 수 없었다. 마지막 디저트로는 절인 대추가 나왔는데 코스 전반에 기승전결을 넣으려는 요리사의 욕심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의 진정한 디저트는 그 다음이었다. 불꽃 앞에서 웍을 잡고 있던 요리사는 우리가 나가는
모습을 보자 땀을 뻘뻘 흘리며 인사를 했다. 중국에서 수련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 자신의 이름 ‘복춘’을 따서 식당을 만든 바로
그였다. 그날 밤, 예약한 번호로 ‘찾아주어 감사하다’는 문자가 왔다.
아마 이 정도 의욕과 열정이라면, 그 모두를 단단히 받친 실력이라면 이 집 앞에 손님이 줄을 서는 것은 내일 아침 해가 뜬다고 말하는 것만큼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일에 태양의 거대한 중력과 지구의 자전력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듯, 이 식당을 세우기 위해 그이가 흘린 땀의 무게를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본인 혼자뿐일 것이다.
[출처 : http://mediahub.seoul.go.kr/archives/1108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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