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 맛있는 한끼, 서울(21) 종로구 "와"
밤이고 낮이고 인사동에 있었다. 낮에는 작고한 천상병 시인 부인이 운영하는 찻집 ‘귀천’에 가서 차를 마시고, 밤이 되면 인사동 어귀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인사동 거리를 걷다보면 내가 자주 가는 곳 주인장을 마주칠 적이 있었다. 그러면 나와 상대방은 얼떨결에 인사를 하기도 했다. 옆 객(客)과도 친분이 생겨 이런 질문을 받은 적도 많다.
“인사동에 사나 봐?”
실상 나는 버스로 30분 걸리는 영등포에 살았다.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관광객이 들어차는 인사동이 나는
좋았다. 일주일에 두 세번 꼴로 인사동에 갔다. 너른 중앙대로 옆으로 핏줄이 퍼지듯 깔린 골목길이 좋았다.
골목길을 걷고 또 걸으며 지형을 익혔다. 골목에 깔리는 빛은 사납지 않았고 아늑했다. 사람들은 그 불빛 아래로 모여들었다. 계곡이 있으면 물이 흐르듯, 그 좁은 골목 사이 사이 자연스레 자리한 가게들은 신기한 것들로 가득찬 다락방 같았다.
그 중 특히 아꼈던 곳은 막걸리를 파는 흔한 민속주점도 아니고, 방석 위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야 하는 전통 찻집도 아니었다. ‘와(和)’라고 이름 붙인 일본식 주점이었다.
‘에지리상 건강하세요’라는 포스트잇이 붙어있던 그곳은 말 그대로 오사카 출신 에지리씨가 하는 주점이었다. 딸린 직원들도 모두 일본인이었던 그 술집은 주인장 건강 문제로 며칠 씩 쉬기 일쑤였다. 게다가 좌석도 얼마 되지 않고 그마저 금세 차버리는 까닭에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곳을 즐겨 찾았던 가장 큰 이유는 맛과 분위기였다. 아르바이트생이 틀어놓은 댄스음악이 들리는 주점의 산만함도, 만들어놓은 것을 데워 맛도 향기도 빠진 음식도 없었다. 대신 어깨가 둥근 여자들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어색하지만 친절한 억양으로 주문을 받았다.
가게에 흐르는 음악은 늘 재즈였다. 흥겹지만 차가운 그 선율 속에 사람들은 각자 리듬에 맞춰 화음을 만들었다. 그 밤은 폭죽을 터뜨리는 축제가 아니라 어느 늦은 밤 때없이 찾아온 헛헛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친구 같았다.
이제 에지리씨는 없다. 내가 한국을 떠난 몇 년 사이, 그녀도 가게를 비웠다. 하지만 ‘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여전히 일본인이 운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포집을 표방한 무국적 술집’이라고 처마 밑에 써붙인 것도 그대로다. 메뉴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원 주인장이 오사카 출신이었던 만큼 이곳에 오면 꼭 오코노미야키를 먹어봐야 한다. ‘믹스’와 ‘SP(에스피-스페셜을 의미)’에 따라 가격과 내용물이 다른 오코노미야키는 누가 먹어도 인정할만한 맛을 낸다.
촘촘히 뿌린 마요네즈와 우스터 소스, 그 위로 살랑 거리는 가츠오부시, 바삭한 껍질과 촉촉히 부드러운 속이 어우러내는 조화는 서울 하늘 아래에서 찾아보기 힘든 정도다.
이것 하나만 시켜도 배가 부르는 것은 금방이지만 고등어를 초절임한 시메사바를 또 아니 먹어볼 수 없다. 고급 일식집처럼 솜씨를 부린 것은 아니지만 소박한 생김새와 맛에 괜히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소금이 아닌 설탕으로 간을 하고 약한 불에서 살살 익혀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일본식 계란말이와 하나씩 집어 먹기 좋은 시샤모도 이 집 베스트 셀러 메뉴 중 하나다. 그리고 날씨가 추워지면 오뎅탕을 시켜 놓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늘어난다.
하나 하나 설명을 달아놓은 사케를 마시며 낮게 웃고 길게 숨 쉬다 보면 밤은 쉽게 늦어진다. 그 웃음과 한숨은 이 작은 가게 안에서 선율을 만들고 그 너머로 밤의 음악, 재즈가 들린다. 작고 작으며 목소리는 크지 않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조용히 사라지기를 선택한다. 그것들이 모여낸 인사동 ‘와’에서 나는 남에게 이해를 바라지 않고 나 스스로도 없는 연유를 알 수 없는 생각을 하며 술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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