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왜 영어를 공부하시나요?
많은 분들이 토익(TOEIC), 토플(TOEFL) 등의 시험이나 학교 성적, 입사, 유학을 위한 자격조건 마련 등을 위해서 영어를 공부하고 계실 것입니다. 간혹 미드나 영드, 마블(MARVEL)과 DC의 코믹스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영어를 배우시는 분도 있겠죠.
제 경우에 지금까지도 영어를 공부하는 목적은 (1) 글쓰고 가르치기 위해서, (2) 재미있게 살려고, 이 두 가지로 압축될 듯합니다. 다시 말하면 직업적으로 필요해서, 또 영어를 통한 다양한 경험이 재미있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어교육 전문가들은 외국어를 배우는 목적을 어떻게 분류할까요? 여러 관점이 있지만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나눕니다.
도구적 관점 (instrumentalist view)
구성적 관점 (constitutive view)
이를 간단히 살펴보죠.
도구적 관점과 구성적 관점
도구적 관점에서는 언어를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봅니다. 언어 자체보다는 언어를 통해 뭘 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구성적 관점에서는 지식과 경험을 만드는 언어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영미문화나 영어 모국어 화자들을 이해하는 것과 영어에 대한 이해는 별개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영어는 하나도 모르는데 영미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편입니다’라고 말하면 비웃음을 사겠지요.
사실 언어 특히 외국어 학습에서 도구적 관점과 구성적 관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중국에서 장사를 해서 사업에 성공하고 싶다면 중국어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중국어를 배우다 보면 중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깊어집니다. 도구적 동기에서 시작했지만, 새로운 지식을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중국 문화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중국인들의 생활양식을 파악하기 위해 언어를 배우는 것은 결국 어떤 도구적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문화와 지식, 사상과 완전히 유리된 언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재미로 시작한 ‘덕질’이 경제적, 사회문화적 가치를 갖게 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물론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말이나 엘프어를 배우는 경우라면 도구적 가치보다는 구성적 가치가 훨씬 크겠죠. 엘프어를 써서 무역을 할 수도, 관광지에서 써먹을 수도, 이력서에 적을 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도구적 효용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에게 “야, 너 [반지의 제왕]에 나온 엘프가 어떻게 말하는지 아냐?”라고 말할 때 차오르는 벅찬 자부심을 느끼는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도구적이냐 구성적이냐를 칼로 무 베듯 나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문제는 한국 상황에서 시험과 승진 등의 도구적 가치가 언어를 통해 소통하고 지식을 확장하며 재미를 찾아가는 구성적 가치를 압도한다는 것입니다.
도구적 관점과 미국의 외국어교육 정책
한국의 영어교육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국 상황에서 이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대립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많은 언어학습·응용언어학 연구자들과 교사들은 정부가 언어를 도구적 관점으로만 바라본다고 비판합니다. 언어를 사회와 문화, 정체성의 총체로 접근하기보다는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는 주장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외국어에 대한 도구적 관점은 양차 대전 전후 미국 정부가 펼친 언어정책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미국은 2차 대전 당시 군대식 교수법(Army Method)이라는 언어 학습법을 군에 보급하여 빠른 시간 내에 군이 필요한 작전 지역에서 상대방 국가의 언어로 임무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주로 청화식 교수법(Audio-lingual method)에 기반한 것이었죠.
용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청화식 교수법은 듣고 말하기에 방점을 두며, 고전적 행동주의 심리학을 학습의 원리로 채택합니다. 인간의 학습은 기본적으로 습관 형성이며, 습관의 형성을 위해서는 특정한 언어 패턴을 계속 듣고 반복해서 따라 말하고 적절한 언어적 선택을 했을 때 긍정적인 보상을 주는 방식이 이상적이라는 것입니다.
테이프나 MP3를 질리도록 듣고 반복하는 것이 바로 청화식 혹은 군대식 교수법의 전형적인 학습방법입니다. 작전에 나갈 군인들은 수개월 간 하루에 열 시간 이상씩 스파르타식 언어교육을 받으며 기본적인 외국어 구사 능력을 키웠습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달려 있기에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군사작전을 위해 언어교육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던 역사는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에도 나타납니다. 소련이 먼저 우주선을 쏘아 올리자 미국 전체는 완전한 충격에 빠집니다. 바로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이를 기점으로 과학교육에 상당한 예산이 배정되고 과학의 중요성을 홍보하는 영화들이 많은 학교에서 상영됩니다. 그야말로 과학으로 적을 이겨야겠다는 도구적 관심이 엄청난 예산을 과학교육에 쏟게 만든 것이지요.
오일쇼크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70년대 후반 카터 대통령은 지혜를 통한 힘의 배양(Strength through Wisdom) 정책을 천명합니다. 여기에서 외국어 교육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고 또 한번 ‘부강한 나라를 위한 언어교육’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죠.
이후 미국 사회에서 21세기 가장 큰 사건이라 불릴만한 9.11 이후에 미국의 외국어교육은 또 다시 큰 변화를 겪습니다. 소위 ‘전략적 언어들'(아랍어, 중국어, 한국어 등)에 대한 예산 지원과 개설 강좌가 증가했으며, 등록하는 학생도 많아졌습니다. 미국의 외국어 교육 정책기조 및 예산을 고찰해 볼 때 미국이 외국어를 도구로 보고 있음은 자명합니다.
언어를 배우는 목적을 달랑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언어의 가치를 보는 관점이 어느 쪽에 가까운 가는 언어정책의 방향에 분명한 영향을 미칩니다. 정책을 입안하고 가용한 경제적 자원을 배분하는 데 있어서 사고의 틀이 갖는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영어와 나의 삶
미국 이야기에서 우리의 삶으로 초점을 옮겨 질문 몇 개를 던져 봅니다.
나는 왜 영어를 배우는 거지? 시험과 승진이 중요한 건 알겠는데, 그것뿐인가?
그토록 오랜 시간 그토록 많은 돈과 에너지를 쏟아부은 영어는 나에게 어떤 가치와 의미를 주었지?
내가 영어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목적을 이룬 건가?
영어는 내 삶의 어떤 면을 구성하고 있지?
영어는 내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은 거지?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어떤 대답을 하고 계신가요?
말씀드렸듯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목적을 위한 도구냐 지식의 구성이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외국어 공부가 단순히 사회가 요구하는 목표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면 영어공부는 앙상하기 짝이 없는 스펙쌓기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삶에서 외국어가 가지는 의미를 스스로 정의하고 이를 추구하다 보면 동기가 높아지고 더 재미있는 영어공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든, 한국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알려내고자 하는 의도이든, 비틀즈의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고 감상하고 싶은 욕망이든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영어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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