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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I/Tech Journalism

[Organic media]컨테이너의 숨겨진 쟁점의 이해

컨테이너의 숨겨진 쟁점의 이해 (Understanding Containers in Organic Media)


<이전 포스트: 미디어의 3가지 구성요소>



앞에서 미디어의 3가지 구성요소를 정의하고 각각의 요소들이 인터넷 환경에서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고 진화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번 포스트와 다음 포스트에서는 ‘컨테이너’ 요소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미디어에서 컨테이너의 쟁점은 무엇이고 앞으로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 살펴보고 현재 인터넷 기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컨테이너의 해체 현상과 그 결과’가 미디어를 어떻게 새롭게 형성시키고 있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이 포스트에서는 먼저 그 쟁점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집중하도록 하자.



물리적 컨테이너에서 벗어나는 것은 ‘깨어남’과도 같다


우리는 미디어의 컨테이너를 통상적으로 책, 텔레비전, 라디오 등 물리적 틀걸이로만 인지해왔다. 하지만 컨테이너에는 숨겨진 쟁점이 있다. 철학자이자 과학기술자(technologist) 인 데이빗 와인버거(David Weinberger)는 2012년 자신의 저서에서 컨테이너의 형태가 우리의 사고와 지식을 규정하고 가두어 왔음을 밝힌 바 있다(David Weinberger, Too big to know, 2012.). 


예를 들면 ‘책의 형태에 기반한 사고 (book-shaped thoughts)’는 평면적이고 획일적이며 순차적(sequential)이어서 이러한 책을 통해 습득된 우리의 지식은 그동안 이 인쇄 미디어의 물리적 형태(form)와 그 특성 속에 가두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운 컨테이너들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고 전달하는 것은 ‘책’ 이라는 컨테이너 기반의 과거 환경과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데이빗 와인버거는 ‘네트워크화된 지식’의 출현(또는 환기)을 염두에 두고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 transformation is a straightforward acknowledgement of one basic truth we’ve always known but that our paper-based system of knowledge simply could not accommodate: The world is far, far too big to know. (David Weinberger, Too big to know, 2012.)”


책은 그동안 우리에게 지식을 주는 도구였는데, 우리의 생각을 그동안 가둬놓은 틀걸이였다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은 의식의 ‘깨어남’과도 같다. 수백년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체 (마치 지구가 우주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기 이전 단계처럼)’로 받아들이던 단계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물론 책의 역할이 아니다. 미디어에서 ‘틀걸이’ 로만 이해해온 컨테이너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운 현상들이 그 깨어남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컨테이너를 어떻게 이해해야한다는 말인가?



컨테이너(Container)의 정의


앞에서 컨테이너를 메시지(내용물, 콘텐츠)를 담고 있는 단위로 간략히 정의하였다. 여기에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와 환경‘라는 미디어 정의를 다시 환기한다면 일반적 컨테이너의 특성 대비, 미디어 컨테이너의 특성을 좀 더 명확히 정의할 수 있다.


미디어에서 컨테이너는 내용물을 담는 용기임과 동시에 커뮤니케이션 내용을 전달하고 수신하는 장치(시스템)를 포함하는 단말기(terminal)의 뜻을 공통적으로 내포하게 된다.


방송 프로그램을 수신하는 텔레비전, 라디오, 음악을 듣는 MP3 플레이어, 종이책 등이 이와 같은 의미의 대표적인 미디어 컨테이너이다. 책도 텍스트와 이미지 등 (최근에는 동영상과 오디오 파일 등까지 포함)을 통해 저자의 메시지를 담고 독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독자도 책을 통해 그 메시지를 수신한다. 다만 얼마나 실시간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뉴미디어와 전통미디어 컨테이너의 뉘앙스가 달리질 뿐이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물리적 용기만 컨테이너는 아니다. 책의 경우는 종이책 뿐만 아니라 아마존 킨들라는 전자책 리더도 컨테이너고 그 안에 담긴 책도 컨테이너이다. 종이와 제본 대신 전자 화면과 코드로 이뤄진 컨테이너이다. 그 밖에 콘텐츠를 담고 있고 전달 방법(수단)을 가지고 있는 모든 미디어, 예를 들면 영화, 소설, 음악 등도 컨테이너로 볼 수 있다. 책이 종이 페이지를 갖고 있듯 영화도 필름 컷(film cut)을 갖고 있으며, 음악도 악보, 악기 등의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내용물을 전달한다. 


이렇게 보면 컨테이너는 물리적이든 아니든 ‘내용물을 담고 있으며 전달장치를 포함한 틀걸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컨테이너가 콘텐츠를 담아 전달하는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콘텐츠를 담은 틀걸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던져야 컨테이너를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 인터넷 기반 미디어의 현상을 여과없이 볼 수 있다. 컨테이너의 진짜 쟁점은 여기서 시작된다.



컨테이너는 콘텐츠이고 콘텐츠는 컨테이너이다


레미제라블(Les Miérables)‘의 예를 들어 보자. 레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자, 영화이며 뮤지컬이다. 또한 뮤지컬 용도로 작곡된 레미제라블의 음악은 최근 피겨선수 김연아의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100년이 넘도록 다양하게 해석되고 인기를 누리는만큼 레미제라블의 컨테이너도 다양해졌다. 


그런데 현상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이 컨테이너들은 언제든지 맥락에 따라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제목의 책, 영화, MP3는 컨테이너이다. 레미제라블이라는 내용(콘텐츠)를 담고 있으며, 이를 독자와 관객, 청취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는 영화관이라는 컨테이너의 콘텐츠이기도 하다. 극장은 수많은 콘텐츠(영화)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컨테이너이기 때문이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레미제라블의 메시지를 담은 컨테이너이지만 동시에 뮤지컬과 영화의 콘텐츠이기도 하다. 그리고 김연아가 연기한 피겨 프로그램의 콘텐츠(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소설로 전달될 때에는 페이지라는 용기를 거쳐 다시 ‘책’이라는 용기로 전달된다. 이 때 페이지도 컨테이너임과 동시에 콘텐츠가 된다.





모든 컨테이너는 맥락에 따라 콘텐츠가 될 수 있으며 콘텐츠를 전달하는 역할에 국한되어 논의될 수 없다.


위의 그림은 이와 같은 컨테이너와 콘텐츠의 관계를 도식화해서 나타낸 것이다. 컨테이너1은 콘텐츠1을 담고 있지만 컨테이너2에서는 콘텐츠가 된다. 또 거꾸로 콘텐츠3은 동시에 컨테이너2이기도 하다. 유튜브 동영상은 뮤지컬이나 피겨 스케이팅 프로그램을 담을 수 있는 컨테이너이지만 이것이 페이스북에 링크된다면 이 때는 컨텐츠가 된다.


그럼 맥락에 따라 컨테이너가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가 컨테이너가 되는 현상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세 가지 측면에서 숨겨진 쟁점을 꼽을 수 있다.



컨테이너의 역할은 콘텐츠 전달을 넘어선다


첫째, 컨테이너가 반드시 콘텐츠를 통해서만 정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내용물(메시지)은 결국 컨테이너를 온전히 정의하지 못하며 따라서 컨테이너와 콘텐츠는 (서로 의존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리되어 사고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미디어 자체를 메시지(콘텐츠)로 봐야 한다는 맥루한의 주장과도 연결되어진다(McLuhan, The medium is the message, 1967). 사실 우리가 언급하는 컨테이너는 맥루한의 연구에서 ‘미디어’로 명명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다만, 컨테이너라는 명칭이 ‘콘텐츠 (담겨 있는 내용물)’ 를 전제로 하는 것에 반해 맥루한의 미디어는 반드시 내용물을 내포하지는 않는다는 차이를 지닌다.


컨테이너와 콘텐츠를 분리하고 컨테이너를 메시지로 보면 컨테이너의 다른 면모에 눈을 뜨게 된다. 맥루한이 지적한 ‘사회적’ 역할이 그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글은 지속적이며 (continuous) 순차적(sequential)인 방식으로 씌여진다. 이렇게 작성된 콘텐츠는 획일적인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를 통해 생산된다. 이것이 인쇄물이다. 


맥루한은 18세기 이러한 인쇄물의 미디어적 특성이 사람들을 획일화(uniformise)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사회 전체를 하나로 움직이게 하는 인쇄 미디어의 힘이 프랑스 혁명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다 (McLuhanUnderstanding media, 1964). 인쇄물이라는 미디어가 그 자체로 메시지가 된 사례이다.


이와 같이 미디어(컨테이너)의 궁극적 역할은 콘텐츠를 전달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과 사회 구조, 관계 등을 구조화하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주체이기도 하다(McLuhan, Understanding media, 1964). 이것이 컨테이너가 콘텐츠를 전달하는 역할을 넘어서는 이유이다.



모든 컨테이너는 서로 연결되고 공존한다


둘째, 이와 같이 콘텐츠, 컨테이너들의 연결된 관계를 보면 하나의 컨테이너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컨테이너들과의 연결된 관계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맥루한이 새로운 미디어는 이전 미디어를 근간으로 파생되거나 확장된다는 관점에서 언급한 내용과도 같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이전 미디어의 사회적, 관계적 영향력을 확대하거나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등장한 뉴미디어(컨테이너)는 언제든지 이후에 등장하는 뉴미디어(컨테이너)들에 고스란히 영향을 다시 미치게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대중’을 보자. 대중이라는 단위의 출현은 텔레비전과 함께 급작스럽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이미 인쇄물의 보급에서부터 ‘불특정 다수’라는 메시지 수신자 그룹이 생겨났고 방송 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증폭(acceleration)된 것이다. 인쇄물의 사회적 효과와 영향력도 맥락을 같이 한다. 텍스트라는 활자화된 미디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 활자화된 미디어는 구어 중심의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여기에 20세기 초반 이후 등장한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그 현상을 더욱 증폭시킬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메시지 수신자들은 ‘대중(mass)’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쉽게 묶일 수 있게 된다. 대중들은 동시간에 같은 메시지를 공유하면서도 즉각적으로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지 못한다. 


물리적으로는 분산되어 있으나 구조적으로는 하나의 메시지를 수용하는 수동적인 집단이다. 이것이 대중의 정의이자 정체성이며 콘텐츠 자체보다 컨테이너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와 같이 모든 새로운 컨테이너는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전후 환경 및 연결된 컨테이너들과 공존하면서 서로 (사회적) 역할을 하게 된다. 컨테이너들간의 상호작용 과정을 관찰해야지만 컨테이너의 변화와 쟁점을 이해할 수 있다.



컨테이너의 실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가변적이다


컨테이너는 자신이 담고 있는 콘텐츠를 통해서만 정의되거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컨테이너는 콘텐츠 용기에 국한되지 않으며,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후 주변 컨테이너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컨테이너가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손에 잡히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콘텐츠 및 다른 컨테이너들과의 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가변적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컨테이너는 언제든지 다른 컨테이너의 콘텐츠가 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컨테이너는 물리적 형태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가변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지금의 인터넷 공간에서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위의 이미지에서 왼쪽은 ‘레미제라블’ 검색 결과를, 오른쪽은 페이스북 포스트에 언급된 레미제라블 동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검색결과에는 레미제라블 소설책과 영화, 뮤지컬이라는 콘텐츠 및 컨테이너가 다양하게 언급되어 있고, 검색 결과라는 이 묶음이 다시 하나의 콘텐츠 및 컨테이너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페이스북의 포스트는 레미제라블 영화 동영상과 이를 패러디한 동영상을 나란히 담고 있으며 이 상황에서 유튜브 동영상은 콘텐츠가 되었고 페이스북 포스트는 기꺼이 컨테이너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컨테이너란 어떤 내용물을 담고 있는 ‘상태’를 정의할 뿐이며 그 상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물리적 형태라는 것은 우리가 컨테이너에 대해 가져온 제한된 시각일 뿐이며 심지어 다른 열린 관점들까지 제한하는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컨테이너가 맥락에 따라 가변적이 되는 현상은 지금 인터넷 기반의 서비스들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컨테이너의 해체 현상은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깨우쳐 주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레미제라블 트위터 검색결과와 동영상 링크 예시는 지금 인터넷 공간에서 나타나는 컨테이너와 콘텐츠의 새로운 관계, 컨테이너의 다양화와 해체 현상들을 함축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나아가 콘텐츠 게재자와 지인들과의 관계, 서비스들(컨테이너)간의 관계 구조 등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례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물리적 컨테이너 기반 미디어가 실제로 인터넷과 함께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구조적 컨테이너’ 라는 시각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래서 제한된 통념에서의 ‘깨어남’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다음 포스트: 구조적 컨테이너, 새로운 언어의 시작이다 I >


[일러두기: 필자가 언급하는 컨테이너는 기본적으로 맥루한의 미디어 관점과 맞닿아 있다. 다만, 우리는 미디어와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목적을 두는 것 보다, 오가닉 미디어가 전통적 미디어와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 차별점을 담을 수 있는 프레임워크를 구조화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인터넷 기반의 미디어 현상이 기존의 것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즉,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medium is message)'라는 정의와 맥을 같이 하면서도, 미디어를 컨테이너, 컨텐츠, 컨텍스트의 요소로 해부하는 과정을 거쳐 오가닉 미디어에 대한 새로운 관점(perspective)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맥루한의 '미디어'를 '컨테이너'로 독해하고 언급한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음을 일러두고자 한다.]


 

March 28, 2013
Dr. Agnès Jiyoung YUN
Organic Media Lab Founder & CEO

email: yun@organicmedialab.com
facebook: yun.agnes
Twitter: @agnes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