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장 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박준상 역, 인간사랑, 2010)를 읽고
1)장 뤽 낭시
낭시(Jean Luc Nancy)는 국내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 사연이
길지만 줄여 말하자면 우연한 계기로 그의 책 ‘무위의 공동체’를 읽게 되었다. 번역은 낭시의 제자이면서 현재 숭실대 철학과
재직하는 박준상 교수가 맡았다. 이 책은 쪽수로 따지자면 그리 두꺼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내용이 난해하여 정말 한숨이 나오지만
그래도 끝내 책을 놓치 못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 독특한 매력 때문에 나는 꼬박 이틀 동안이나 그 책을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다 읽은 이후 나는 경탄과 아쉬움이 뒤섞인 묘한 기분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쓰게 된 낭시의 마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가 추구했던 목표 즉 ‘무위의 공동체’에 매혹되었으나 마지막 순간 과연 그게 그렇게 될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나는 이 책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낭시가 제기한 문제를 함께 토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소개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서평을 쓴다는 것 자체를 회의하면서도 서평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용이 워낙 난해한지라 쉽게 쓰기 위해 약간의 일탈을 범한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낭시의 삶에 관해서는 나 역시 잘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텐 미니츠-첼로(ten minute older & the
chello)’(2002.11; 텐 미니츠-트럼펫의 후속편)라는 영화에 그가 출연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여러 감독들이 만든
옴니버스 영화이다. 그 가운데 클레르 데니(Claire Denis)라는 감독이 만든 단편을 보라. 그 제목이 ‘낭시를
향해(Vers Nancy)’이다.
감독은 낭시가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기차 여행을 하면서 토론하는 장면만을 시종일관 쇼트한다.
여기서 낭시는 유럽의 이주민에 관해 아마 집시 출신 아니면 동구 출신인 듯한 여학생과 토론한다. 낭시는 이주민의 문제를 그의
대표적인 철학적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타자의 문제’와 연관시키고 있다.
낭시는 흔히 구조주의 방법에 기초한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의 제자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의 개념들을 뒤지다 보면 다양한 사상들이 그
개념들 속에서 서로 교차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이 있다면 하이데거, 사르트르, 레비나스에
이르는 현상학적 실존주의적인 방법론의 영향이다. 여기에다 라캉, 바타이유로 전해지는 정신분석학적인 개념들이 배음을 이루고 있다.
그의 ‘무위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추적해 나가면서 단순화를 위해 이 복잡한 사상들 가운데 아마 핵심이 되는 실존주의적 사상의
흐름을 주로 따라가 보려한다. 이 무위의 공동체가 바타이유가 제기한 물음을 좇아서 작성되었다는 것조차 무시하면서 말이다.
2)공동체의 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망설여진다. 우선 그의 한탄부터 들어봐야 할 것 같다. 그는 ‘무위의 공동체’ 첫머리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대 세계에 대한 가장 심각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증언은 .....공동체가 해체되었다는 것 또는 불타버렸다는 것에 대한 증언이다.”
그의 말은 간결하지만 그 속에는 상실의 아픔과 그리움이 가득 배어있다. 특히 그가 공동체가 “불타버렸다고” 말하는 것 속에는 마음 깊은 속에서 울리는 분노감조차 느껴진다. 그는 왜 이렇게 분노하는 것일까?
그는 이미 역사 속에서 여러 번 이런 공동체의 꿈이 출현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하나가 마르크스주의의 공동체이며 또 다른
하나가 파시즘의 공동체이었다. 이런 공동체는 결국 공동체에 대한 인류의 꿈을 배반했다. 그 배반 때문에 낭시가 분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 배반을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나 파시즘이
공동체에 대한 순수한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역사적 실천 속에서 현실 때문에 그 꿈을 버리고 배반한 것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낭시는
마르크스주의나 파시즘이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의 꿈이 진정한 공동체, 근원적인 공동체에 대한 꿈이었는지에 대해 의심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나 파시즘은 처음부터 마치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이 허망한 토대 위에 인류의 꿈을 실현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낭시가 이 책에서 목표로 하는 것은 근본적이고 진정한 공동체의 개념을 세우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진정한 공동체, 코뮌주의의 개념은 무엇인가? 이를 위해서 낭시는 공동체라는 개념의 다양한 가능성을 추적한다. 우선 우리가
자주 ‘이익의 공동체’라고 말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는 공동체 개념을 보자.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하는 공동체의 개념이다. 각
개별자가 상호의 합의를 통해서 공동의 이익(이로부터 발생하는 공동의 가치, 공동의 목표 등등)을 발견할 때 이런 공동체가
구성된다.
그러나 일찍이 이런 ‘이익의 공동체’에 대립하는 공동체 개념이 제시되어 왔다. 이것은 가족이나 민족과 같은 혈연적 공동체에서 주로
나타난다. 가족을 생각해 보라. 한데 뒤엉켜 자고 있는 가족들을 보면 혼연일체라는 무차별성의 개념이 단번에 이해된다. 그러나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이 있듯이 각 가족은 가족 속에서 자신의 개별성을 추구한다. 이때는 차별성이 가족의 특징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혈연공동체의 특징을 개념적으로 규정하면, 그것은 ‘융합’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공동체가 된다. 개인은 이미 자기 내부에 타인을
간직하고 있다. 타인의 내부에 이미 자기가 들어 있다. 그러기에 서로가 이미 타인에게 넘어가 있고 서로가 타인을 요청한다.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 타인을 전제로 한다. 거꾸로 자신이 존재해야만 비로소 타인도 존재할 수 있다. 이런 공동체는 나와 타인이
이렇게 뒤섞이고 융합됨으로써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혼연일체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는 자신의 개별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와 같은 공동체 개념은 한편으로 전체가 혼연일체를 이루므로 ‘무차별성(indifference)’을 특징으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속에 각자는 자신의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차별성(difference’)을 특징으로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차별성’과
‘무차별성’은 동일한 공동체 개념의 양면적인 특징이다.
융합의 공동체는 차별성과 무차별성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혼연일체를 강조할 때 이 공동체는 파시즘이 추구했던 사회, 불가분성을
강조하는 전체주의가 된다. 낭시는 이런 점에서 파시즘은 ‘연합의 존재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말한다. 연합은 곧 융합 즉
무차별성을 말한다. 노스탤지어라고 함은 과거 혈연 공동체에 존재했던 것을 되살리려 한다는 의미이다.
낭시가 비판하려는 공동체가 바로 이런 두 가지 공동체이었다. 이익의 공동체로서 마르크스주의의 공동체 그리고 융합(연합)의
공동체로서 파시즘적인 공동체이다. 낭시는 이런 공동체의 개념이 불가피하게 공동체에 대한 인류의 꿈을 배반하도록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3)내재성의 파국
공동체 개념을 설명하다가 많이 길어졌다. 그러면 낭시가 추구하는 세 번째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 이런 물음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낭시의 사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낭시는 이상에서 제시된 두 가지 공동체 개념들이 모두 ‘내재성’의 원리에 기초하여 수립된 공동체
개념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서 내재성의 원리란 주체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것을 말한다.
이 내재성의 원리를 통해서 생산(구성이나 형성)이 이루어진다. 생산은 대상을 향할 수도 있고(노동) 자기를 향할 수도
있다(교양). 사회적 교환은 이 내재성의 원리를 확산한다. 이를 통해 공동으로 생산된 공동의 세계가 형성된다. 마르크스주의
공동체이든 파시즘적인 융합이든 그 출발점은 모두 내재성 곧 생산, 구성, 노동이다.
인간은 심지어 이 생산을 통해 죽음조차도
지배하려 한다. 인간은 죽음과 투쟁하여 기억을 생산한다. 그 기억을 통해 그는 죽은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낭시는 이를 ‘죽음의
과제화’라고 말한다. 죽은 이후 기억을 위해 사진을 남겨놓는 인간의 집착을 생각해 보라.
하지만 낭시는 내재성이야 말로 공동체 개념의 걸림돌이라 본다. 그가 내재성의 원리를 일체 버리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내재성의 원리의 바탕에는 그 토대가 필요하며, 내재성의 원리 자체만으로는 공동체의 꿈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공동체의 세계의 토대는 무엇인가? 낭시는 이를 외재성의 원리, 즉 ‘바깥’의 원리라 한다. 인간의 내재성이 주체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라 한다면, 외재성이란 곧 이런 내재성이 파국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는 내재성의 원리 넘어서 원초적 자연세계 즉 초월적인 신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내재성의 세계를 넘어서는 운동을 말하려 한다. 그 운동이 곧 외재성의 원리이다. 그런 점에서 외재성의 원리란 곧 내재성의 파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외재성이란 바깥에 있는 어떤 장소, 사물이 아니라 초월하는 운동, 생기하는 사건이다.
나는 이 세계 속에 살면서 때때로 내가 다루지 못하는 것들에 부딪힌다. 예를 들어 갑자기 해고되어 생활의 길이 막막해졌다든가, 몇
년 동안 사귀었던 애인이 어느 날 이별을 선언한다. 이런 경우 나의 세계에는 이런 저런 구멍들이 출현하는 것이라 보겠다. 이런
경우라면 비록 충격은 받겠지만 그런대로 나는 나의 세계를 수습해서 삶을 계속한다. 내재성의 파국이란 이런 위기들을 말하지 않는다.
내재성의 파국이란 나의 세계가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디디고 있는 땅 자체가 흔들리는 경험이다.
이런 경험은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로 사람들은 이런 경험에 부딪힌다. 나의 세계에 이런 저런 구멍이 뚫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경험, 이것은 곧 무에 대한 경험(즉 낭시가 자주 말하는 ‘내적 경험’)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죽음에 직면해서 죽음 앞에서 겪는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외재성에 대한 낭시의 설명을 보면 하이데거나 사르트르가 그에게 얼마나 깊게 영향을 주었는지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이런 죽음의 경험을 불안의 경험으로 설명한다. 사르트르는 이런 경험을 구토에 대한 경험으로 설명한다.
4)탈자의 철학
낭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잠깐 실존철학에서 제시하는 죽음의 경험을 살펴보자. 인간이 죽음에 대면했을 때, 여기서 인간에게 두
가지 가능성이 출현한다. 한 가지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그저 떨면서 그 앞에 무너지는 경우이다. 아니면 이런 죽음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그것에 체념하는 것이다. 이 어느 경우에도 인간의 주체성은 현재 그대로 남는다. 그런 점에서 이는 자기를
고집하고, 자기를 통해 세계를 구성하려는 내재성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죽음을 어떻든 자기의 것으로 생산하고자 하니
이런 몰락과 체념이 등장한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다가오는 죽음을 스스로 인수하는 태도이다. 죽음을 인수한다는 것, 그것은 마치 운명을 인수하는 것과 같다.
운명을 인수할 경우, 그 운명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듯이, 죽음을 인수하는 것 역시 죽음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다. 운명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그는 이 운명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면 그는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다시 말해 죽음을 통해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넘어서는 것을 실존철학에서는 ‘탈자(자기를 벗어남)'
또는 '탈존(ek-sistence;실존)'이라고 한다. 낭시가 말하는 죽음의 경험이란 죽음 앞에서의 탈자, 탈존을 의미한다.
죽음 앞에서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하는가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결단에 의존한다. 실존철학은 이를 미래를 향한 결단이라 하며 인간의 모든 윤리적 태도의 출발점은 바로 이런 죽음 앞에서의 결단에서 찾고 있다.
이렇게 인간이 죽음 앞에서 죽음을 인수하고, 자기를 넘어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는 시인 릴케의 유명한 작품인
‘말테의 수기’에 잘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주인공 말테는 자기 할아버지가 죽음에 직면한 태도를 어떤 사람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며,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한 것이며 헤아릴 수 없는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이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낯선 것으로 묘사한다.
죽음은 이렇게 주인공에게 고독과 엄숙함과 거대함, 낯섦을 부여한다. 낭시가 말하는 죽음의 경험
역시 그런 것이다. 따라서 낭시는 ‘밖(외재성)’과 ‘고독’,‘죽음’, ‘타자’, ‘유한성(단수성)’을 모두 같은 의미라고
설명한다. 심지어 그는 이런 죽음 앞에서 선 인간의 존엄한 모습을 ‘최고 주권적souvereign 존재’라는 표현으로 표사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라. 사형대 앞에 서 있는 혁명가들의 모습을. 죽음 앞에서 의연하게 서 있는 그들은, 그 엄숙함은 사형대를 둘러싼 모든
시끄러움을 제압한다. 그의 모습은 이 세계를 벗어난 압도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그 전까지 그는 그저 인간이라는 생물 중의
하나이었다. 그러나 사형대 앞에 선 순간 그의 고독함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혁명가는 그 순간 그 거대한 무게감을 가지고 그를
처형하는 억압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5)타인의 죽음
낭시가 내재성의 파국 또는 죽음의 경험을 말했을 때 그는 실존철학에서 흘러내려오는 이런 죽음을 통한 탈자, 탈존의 경험을 재해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낭시와 실존철학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실존철학에서 경험은 항상 개인의 내적인 경험이다. 타인이 겪는 경험을 나는 느낄 수가 없다. 이런 입장에서 죽음의 경험 역시 개인의 내적인 경험에 그친다. 불안이든, 구토이든 그것은 모두 나의 경험이다. 나는 타인의 죽음을 보지만 타인이 여기서 어떤 경험을 겪는지를 알 수는 없다. 타인은 나와 마찬가지의 인간이니 나와 비슷한 경우에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라고 짐작 또는 유추할 뿐이다. 그러므로 실존철학은 항상 유이론적 철학에 머물렀으며 타인과의 연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낭시는 죽음의 경험을 통하여 오히려 타인과의 연대를 제시하려 한다. 죽음의 경험이 곧 근원적 공동체의 출발점이 된다.
낭시는 이를 통해 유아론적인 실존철학이 아닌 공동체적인 실존철학, 아니 탈존(탈자) 철학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실존철학
속에서 실존철학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낭시에게서 이런 전환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낭시의 생각은 아래와 같은 명제에 집약되어
있다.
“살아있는 자가 그의 이웃이 죽어가는 것을 본다면 그는 자신의 바깥에서 존속할 수 있을 뿐이다(자기를 벗어날 뿐이다).”
낭시는 불안이나 구토와 같은 경험 대신에 타인의 죽음이라는 경험을 들고 있다. 그런 경험이 나의 죽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의 죽음은 내가 보기에 외면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불과하지 않을까? 나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냉담하거나 때로 연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연민이 지금까지 내가 구축한 나의 세계를 파멸시킬 정도로 커다란 경험이 될 것인가?
낭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심리학에서 자주 말하는 동반 자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동반 자살이란 낯선 사람들 사이에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아니면 사회적인 항의의 표시로 공동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어떻든 동반 자살은 나와 타인 사이의 공통성을 전제로 한다.
때로 우리는 타인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의 슬픔, 그의 기쁨이 생생하게 내게 전해진다. 이런 마음의 전달은 인간에게 고유한 어떤 공감능력에서 비롯된다고 말해진다. 마찬가지로 타인이 죽어가면서 느끼는 내적 경험이 이런 공감능력을 통해 나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것일까? 하지만 낭시가 그와 같은 공감 능력을 발견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6)죽어가는 타인의 얼굴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내가 죽음을 경험한다는 낭시의 명제를 입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 실존철학 계열의 철학자 레비나스 역시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낭시의 주장은 레비나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되어 왔다. 레비나스는 리투니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추방 이후 프랑스 군에 참가했다. 그는 포로가 되어 독일군 수용소를 겪었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직접적인 체험에 기초하여 죽어가는 ‘타인의 얼굴’은 나의 탈존적 죽음의 경험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여기서 왜 ‘얼굴’을 강조하는 것일까? 특히 그는 ‘죽어가는’ 타인의 얼굴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얼굴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얼굴은 다른 신체와 구분된다. 그것은 어떤 다른 것을 암시한다. 그 다른 것이란 무엇인가? 흔히 말하듯이 마음인가 아니면 의식인가? 레비나스는 이런 일반적인 생각을 넘어서서 더 근본적으로 말한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나의 세계 끝에 있으면서 나의 세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곧 절대적 타자, 무한이며 신이다. 결국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신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일상적인 경우, 타인의 얼굴은 나의 세계 속에 규정되어 있다. 이런 경우 얼굴은 그저 다른 신체와 같이 물질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타인이 죽어가면서 그 얼굴에 끝없는 고통이 드러날 때, 이때 타인의 얼굴은 절대적 타자가 된다. 타인의 죽어가는 얼굴 앞에서 나를 중심으로 하는 내재성의 세계는 파국에 처한다. 나는 죽음의 경험에 직면한다. 레비나스의 절대적 타자로서 타인의 얼굴이란 분명 죽음에 직면한 예수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모델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런 예수의 얼굴이 비단 역사적 예수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모든 인간의 얼굴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 절대적 타자를 통해 나는 죽음을 경험한다. 이때 절대적 타자는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나에게 이미 가까이 있으며(근접성) 나에게 달라붙어 있다(강박성). 심지어 나는 타자의 볼모이다. 그것은 마치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힐 경우 그 시선이 나에게 멀리 떨어져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머리 뒤통수에 바로 붙어 있어서 나는
그 타인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강박성, 근접성이 나로 하여금 결단을 촉구한다. 나는
그런 촉구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긴급성을 느낀다. 나는 책임을 느낀다. 이렇게 나는 나의 죽음을 결단한다.
레비나스는 타인과 나의 이런 관계를 통해서 ’환대‘윤리를 정초하려 했다. 환대란 낯선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환영의 윤리이다. 내가
모르고 환영한 낯선 타인이 강도가 되지 않을까? 낯선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나의 환대는 타인의 선물에 대한
대가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전적으로 무조건적인 환대인가? 환대의 윤리 속에는 복잡하고도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런 구체적인 윤리는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의 내재성의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환대의 윤리에서 마지막 결정적인 지점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하는 나의 세계의 포기, 나의 죽음이 전제된다고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타인의 죽어가는 얼굴을 통해 나는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이 그런 포기와 단념의 기초이다. 따라서 죽어가는 타인의 얼굴이 모든 윤리의 기초가 된다.
7)나를 만지지 말라
낭시는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점과 연관하여 낭시는 예수가 던진 말 “나를 만지지
말라noli me tangere(요한복음 20장 17절)”라는 말을 재해석(일반적 해석은 부활한 후 다시 떠나가는 예수가 나를
막지 말라 라고 말 한 것으로 해석된다)한다. 부활한 예수의 몸은 더 이상 단순한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신성한 존재, 마치
신성한 빵과 포도주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손을 대서(생산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나는 믿음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그 믿음은 나를, 나의 세계를 버리고 신에게로 나를 던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타인의 얼굴은 신성한 타자가 출현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나는 탈자의 경험에 이른다.
레비나스의 경우 타인과 나 사이에는 비대칭적 관계가 있다. 타인이 절대적 우위이다. 타인은 나에게 죽음의 경험을 초래하며 심지어
강박한다. 낭시는 레비나스의 입장을 좀 더 확대한다. 그는 타자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을 초래하며 거꾸로 나의 죽음이 타자의
죽음을 초래한다고 본다. 그 관계는 상호적이라기보다 ‘비대칭성의 이중적 교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탈자와 타인의 탈자는 서로 비대칭적으로 작용하면서도 공동의 죽음을 야기한다. 이런 공동의 죽음 속에서 즉 나와 타인,
두 탈자, 공동의 죽음 사이에 그 어떤 틈도 들어갈 수 없는 듯한 내밀성이 발생한다. 이런 내밀성 그것이 바로 공동체성이다.
이런 내밀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내밀성은 결코 친구나 애인에게서 서로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에서 발견되는 내밀성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고독한 죽음 가운데서 서로 아무런 교섭도 없이 일어나는 내밀함이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언젠가 그런 내밀성을 느낀 적이 있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저 사소한 것들 몇 가지와 이름 정도만 알
뿐이다. 나의 삶에서 나는 그를 우연히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그때 나는 그가 죽음을 겪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은 한
순간이었고 곧 지나갔을 뿐이지만 나는 언제나 그때의 인상을 마음에 담고 있다. 그를 다시 본 적은 없다. 물론 대충 어디선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와 같이 살아간다. 그와 같이 대화하고 항상 그의 느낌을 느낀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만나고자 하지 않는다. 만날 필요성도 없다. 낭시가 말하고자하는 내밀성이 그런 내밀성이 아닐까? 다만 짐작할 뿐이다.
낭시는 이런 탈자의 공동체가 인간이 형성하는 최초의 공동체이며 이를 ‘무위(無爲)의 공동체’라 지칭한다. 내재성의 원리가 생산 곧
‘유위(有爲)’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탈자 즉 외재성에 기초한 공동체는 이런 유위가 없다. 그것은 새로운 생산이 아니라 차라리
기존의 세계를 소비, 낭비, 소진하는 것이기에 무위를 원리로 한다. 무위란 곧 탈자를 통해 형성하는 내밀한 관계이다.
이런 내밀성의 공동체는 타인과 나의 죽음, 절대적 타자화를 통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는 죽음의 공동체이며 바깥(탈자,
또는 실존)의 공동체이다. 낭시는 이런 공동체(그는 이를 ‘공동-내-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가 모든 사회적 원리로서의 공동체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8) 비판
낭시는 이런 탈존의 공동체, 공동 내 존재의 가능성을 여러 구체적인 예들을 통해 탐구한다. 그는 독자와 작가 사이에 형성되는
문학적 공동체라든가, 연인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쾌락의 공동체에서 그런 가능성을 엿본다. 유감스럽게도 낭시의 이런 고민을 이
자리에서 일일이 뒤좇아 갈 여유가 없다. 내가 보기에 낭시는 구체적인 예들을 탐구하는 데 그렇게 열성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그저 지나가면서 언급할 뿐이다. 오히려 이런 점에 관해서는 차라리 낭시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리스 블랑쇼의 책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낭시의 생각 가운데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여 보자. 일단 죽음의 경험이라는 실존철학적 근본전제를
받아들이자. 그렇더라도 타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의 경험을 야기한다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불안이나 구토는 나의 내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내가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은 아무래도 내가 내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다.
레비나스처럼 타인의 얼굴이 나의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적 타자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타인의 얼굴에서 타인이 마음이
표현된 것을 느낀다. 하지만 타인의 어떤 얼굴이 나의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적 타자의 표현일까?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인가? 아니면
나를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살해자, 침입자의 모습인가? 아니면 죽음 앞에 무표정한 모습인가? 레비나스가 수용소에서 겪었던 그
죽어가는 얼굴을 과연 나도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수를 다시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아닐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오히려 여기에 있다. 나의 세계의 부정 이후 나는 세계 밖에 존재한다. 그런 다음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가 밖의 세계에 머무르면서 타인과 아무리 친밀한 공동성을 형성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누구나 꿈속에서 자기를 벗어난다.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 꿈속에서 우리는 서로 만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 바깥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 더구나 우리가 꿈속에 살아갈 수 없듯이 바깥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 결국 나는 이 세계 속에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구성하는 과제에 다시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낭시에게 묻고 싶다. 이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가? 아니면 이 세계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또 다른 세계가 있는가?
[출처 :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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