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셴룽 총리는 1952년 2월 15일생이다. ‘용(龍)의 해에 음력 정월 대보름에 태어나 역학적으로 볼 때 최고 길일(吉日)에 출생했다’고 해서, 부친인 리콴유가 ‘빛나는 용’이라는 뜻의 이름을 직접 붙였다고 한다. 이름부터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인 싱가포르를 이끌어 나갈 큰 재목이라는 소망이 물씬 풍긴다.
세계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거친 문무(文武)를 겸비한 리더, 20년 동안 정계·행정부에서 능력을 검증 받은 준비된 지도자, 집권 2년 동안 평균 7.4%의 경이적인 경제 성장률…. 화려한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는 리 총리는 사실 40여년에 걸친 아버지 리콴유의 노련한 제왕학(帝王學)의 산물이기도 하다. 먼저 교육을 보자.
리콴유는 리셴룽이 다섯 살 때부터 말레이어를 배우도록 했다. 싱가포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다리 하나로 연결돼 있는 말레이시아와 관계를 위해서는 말레이어 구사가 필수적이라고 본 것이다. 리 총리는 말레이어 공부를 위해 중·고교 시절 말레이시아 집권당인 암노(UMNO·통일말레이국민조직)의 기관지를 읽으면서 정치 감각도 연마했다.
리 총리는 또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모두 영·미 학교가 아닌 중국계 난양(南洋) 스쿨에서 다녔다. 싱가포르 내 화교와 향후 중국의 강대국 부상을 염두에 둔 리콴유가 중국어 공부를 시키기 위해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리 총리는 국가 수반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영어·중국어·러시아어·말레이어 등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그는 국경일 때 하는 연설도 보통 영어·중국어·말레이어 등 3개를 교대로 쓰면서 한다.
어머니 콰걱추(柯玉芝) 여사도 리 총리의 제왕학 수업에 한몫 했다. 남편 리콴유와 마찬가지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법대를 졸업해 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리셴룽 총리를 포함한 2남1녀의 자녀가 어렸을 때는 점심시간에 고객과 약속을 하지 않았다. 대신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점심을 같이 먹으며 스킨십을 최대한 늘렸다. 아이들이 거만하거나 순종하지 않을 때는 회초리를 들어 체벌(體罰)을 가하는 악역도 도맡았다. 리콴유는 대신 자녀들을 엄하게 꾸짖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했다고 회고했다.
또 리셴룽과 그 형제는 총리 관저에서 살지 않았다. 자식을 집사와 하인이 시중을 드는 호화로운 환경에서 키우고 싶지 않다는 부부의 판단 때문이었다. 리콴유는 “자식에게 너무 엄격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 리콴유의 살아있는 ‘현장정치 교육’이다. 리셴룽이 11살 때부터 지역구 방문 행사나 선거 유세 때마다 그를 따라다니도록 한 것이다. 리셴룽도 아버지와의 동행을 즐겼다. 리셴룽은 12살 때 싱가포르 전역을 뒤흔든 인종 폭동의 참상도 생생하게 경험했다. 그의 소년 시절 가족과의 주된 대화 주제는 저명인사, 사회문제 등에 관한 것이었다(영국 가디언지 보도).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현장정치 공부는 셴룽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과외교육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리콴유 부부는 리셴룽에게 자신들처럼 ‘법대 진학→변호사’ 코스를 강권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좋아하는 진로를 결정토록 하는 원칙을 견지했다. 수학을 유별나게 잘 했던 리셴룽은 싱가포르에서 매년 최우수 고교 졸업생 5명 안팎에게만 주어지는 ‘대통령 장학생’으로 뽑혀 케임브리지대 수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남들이 3년에 마치는 과정을 2년 만에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지도교수들이 영국에 남아 수학자가 되기를 권고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제가 무슨 일을 하든 싱가포르에 있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수학자는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등등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영국 같은 큰 선진국에서는 인력 해외유출이 문제되지 않지만 싱가포르와 같이 작은 나라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제가 꼭 정치를 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설령 욕을 먹더라도 그 길을 택하고 싶습니다.”
리셴룽이 20세 때다. 아버지의 솔선수범하는 행동과 지도가 리셴룽을 대(大)수학자 후보에서 싱가포르 경영자로 발걸음을 돌리게 만든 것이다. 리셴룽이 1982년 첫 부인과 사별(死別)하고 둘째 아들이 자폐증을 앓는 고통을 겪을 때도,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리콴유는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에서 아들의 이 시기를 “셴룽의 세계는 붕괴하고 말았다”고 묘사했다. 개인적 암흑기에 빠져있던 리셴룽을 공적인 무대로 이끌어낸 것도 부친이었다. 리콴유는 1986년 리셴룽을 행정부의 무역공업부 장관에 발탁했다. 1985년 호칭(何晶) 여사와 재혼을 통해 ‘제2의 인생’을 모색하던 아들에게 행정부 장관직이라는 중책을 처음 맡겨 기회를 준 것이다. 1990년 11월 리콴유는 총리 퇴임과 동시에 당시 38세이던 리셴룽을 부총리에 임명토록 배려했다.
리셴룽이 7세 때(1959년) 아버지가 총리직에 오르는 것을 본 이후, 32년 동안 ‘총리의 아들’이라는 후광(後光)에서 벗어나 본격적 홀로서기를 선언한 셈이다. 하지만 2년 후인 1992년 리셴룽이 림프암 판정을 받아 2년 동안 암투병을 할 때나,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3년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같은 위기 때마다 리콴유는 리셴룽의 가장 유력한 국정 자문 교사이자 지지자로 역할을 해왔다.
리콴유는 올해 총선에서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80세가 넘는 노익장의 정치적 투혼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한 싱가포르 언론인은 “리콴유는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84석의 싱가포르 의회에서 한평생 주옥같이 가다듬어온 싱가포르와 아들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훈수(訓手)를 두려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날카로운 눈빛과 뛰어난 논리, 강압적 공포(恐怖)통치로 일관했던 아버지 리콴유와 달리 ‘2세대 지도자’인 리셴룽 총리는 외관상 서글서글한 인상에 늘 웃는 표정이다. 하지만 ‘빛나는 용’이라는 그의 진정한 이름 값은, 그가 얼마나 국민을 진심으로 포용하고 설득하는 리더십을 발휘해 경제는 물론 정치·문화 선진국 싱가포르를 만들 수 있느냐로 판가름 날 전망이다.
※ 리셴룽(李顯龍) 총리 약력
1952년 싱가포르 출생
1974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졸업 (수학 전공)
1979년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최고 경영자 과정 이수
1984년 싱가포르 공군 준장으로 예편, 12월 국회의원 당선
1986년 국민행동당(PAP) 중앙집행위원 피선
1986년 싱가포르 무역공업부장 임명
1990년 부총리 임명
1998년 1월 중앙은행격인 싱가포르통화국(MAS) 총재
2001년 11월 재무장관 겸직
2003년 8월 고촉통 총리, 차기 총리로 지명
2004년 8월 싱가포르 3대 총리 취임
송의달 조선일보 홍콩특파원(edsong@chosun.com)
2006.06.04 09:19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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