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경제 기적은 많은 나라의 선망의 대상이다. 동남아시아의 조그마한 항구도시로 출발한 싱가포르는 1990년대 초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넘어서며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비슷하게 경제기적을 일궜던 홍콩이 1990년대부터 저성장으로 신음했던 것과 달리 싱가포르는 아직까지 선진국 중 높은 수준의 경제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에는 성장률이 7%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경제포럼(WEF)이나 경영개발연구원(IMD) 등에서 발표하는 국가경쟁력 순위에서도 줄곧 1~2위를 유지하고 있다.
인구 400만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국가가 이같이 경제 기적을 지속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싱가포르의 성공비결로 흔히 거론되는 것 자유시장이다. 물품과 자본, 사람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자유도(度) 부문에서 세계 2위권을 유지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곤 한다. 우리나라도 경제자유구역을 만들어 싱가포르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기적은 자유시장만의 결과는 아니다. 자유시장과 정부 지도력의 합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물론 싱가포르의 고속성장은 자유로운 경제환경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싱가포르는 국내 시장이 협소하기 때문에 시장을 지키기 위한 보호장벽을 쌓을 필요가 없었다. 중개무역을 통해 떨어지는 이윤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무역거래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 좋았다.
또 싱가포르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다국적기업에 의존해왔다. 제조업 생산에서 외국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4분의 3에 달한다. 전자, 생명의료산업 등 첨단산업일수록 외국인 투자의 비중은 더 높다. 다국적기업이 필요로 하는 자금과 인력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서 발전해왔다.
1960년대 중반 싱가포르가 이러한 발전모델을 택했을 때 이것은 개발도상국 중에서 유일한 예외였다. 그렇지만 싱가포르 모델은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된 20세기 후반의 추세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다국적기업들의 투자가 저임금 부문만 아니라 고부가가치 부문으로까지 넓혀지면서 이들의 세계적 생산 네크워크를 활용해서 개발도상국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점점 더 넓어졌다. 이제 싱가포르 모델은 세계은행이나 서방 학자들 간에 개발도상국 경제성장의 보편적인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싱가포르를 완전 자유시장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다국적기업들이 투자할 곳을 결정할 때에는 단순히 값싼 임금이라든지 천연자원만 고려하지 않는다. 정치·사회적 안정성, 인프라 공급상태, 인력의 질, 연관기업의 존재, 정부 정책 등을 전반적으로 살펴본다.
그런데 이러한 여건을 제공하는 데 최종 책임을 지는 주체는 정부다. 정부가 투자여건을 어떻게 제공하느냐에 따라 외자유치의 성패가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역설적이지만 세계화가 진전되어 외국자본이 점점 더 자유롭게 오가고 이에 따라 외자 유치를 위한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정부의 역할이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고 할 수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런 면에서 선구자적인 사례다. 우선 외국인의 첫인상이 좋도록 최선을 다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공항시설 및 공항에서 도심까지 들어오는 길, 그리고 도시 외관을 선진국 수준으로 만드는 데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외국인이 왔을 때 일하고 싶고 살고 싶은 느낌을 갖도록 만들고 다국적기업이 투자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사항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서 최선을 다해 제공해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외국기업이 싱가포르에 투자를 하면 그 과실은 싱가포르와 나눠 가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러한 철학은 싱가포르 정부 운용의 곳곳에 배어 있다. 대표적인 기구가 경제개발청(EDB)이다. 세계 최초로 외국기업들의 투자유치를 전담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부 기구이다. 정부 조직도상에는 상공부 산하 기구이지만 장관급 관료를 임명해서 총리에게 직보(直報)체제를 갖춰 놓았다. 외자유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공단건설, 인력공급, 관련법규, 세제, 외국인 거주시설 확보 등 범정부적 지원이 필요한데 이를 한 창구에서 효율적으로 처리하려면 EDB가 상응하는 힘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력 공급에 있어서도 싱가포르는 수요자 위주의 정책을 취했다. 다국적기업이 필요한 인력을 직접 훈련시킬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정부가 직접 만든 기술교육원(Institute of Technical Education) 원장으로는 다국적기업 출신 외국인을 뽑아 필요인력이 잘 공급되도록 배려했다.
외국 인력 활용의 길도 넓게 열어놓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외국 인력을 활용할 때에 정부 부처간에 충돌이 생긴다. 경제성장을 책임지는 상공부나 재무부 등에서는 외국인력 수입에 찬성하지만 국내 고용문제를 책임지는 노동부에서는 외국인력 수입에 반대한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거의 없다. 노동부에 외국인력 유치업무를 맡겼기 때문이다. ‘노동부(Ministry of Labour)’라는 이름을 ‘인력부(Ministry of Manpower)’로 바꾼 것도 이러한 정책의 산물이다.
싱가포르 정부가 다국적기업들에 대해 유인책을 제공하는 능력에서 있어도 어느 나라보다 유리하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현재 싱가포르 땅의 80%는 정부 소유다. 정부가 땅부자이기 때문에 공단을 개발할 때 토지보상을 둘러싸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잘 조성된 공단을 장기저리로 임대해 주는 것은 외국기업에 있어 가장 큰 투자매력 중 하나다. 정부 땅이니까 도로 건설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빌딩이나 주택을 짓더라도 훨씬 계획적인 건설이 가능해진다.
싱가포르식 발전을 하려면 정부가 지도력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유능한 관료들이 부패하지 않고 국가이익을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싱가포르는 이 문제를 강력한 채찍과 당근으로 해결한다.싱가포르는 또 탄탄한 재정을 기반으로 낮은 세율을 유지한다. 1990년대에 25%에 달하던 법인세 및 소득세 최고세율을 21%까지 떨어뜨렸다. 홍콩보다는 아직 다소 높지만 선진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할 때 크게 낮은 편이다. 다양한 세금감면 제도도 한몫 한다. 싱가포르는 외국인 기업들이 지역본부를 두거나 연구개발(R&D)투자 등을 할 때에 세금을 대폭 감면해준다. 수출 비중이 높아도 세금을 적게 낸다.
채찍을 먼저 보자. 수상 직속의 부패행위조사국(CPIB)은 어느 나라의 반부패 관련 기관보다 광범위한 권한을 갖고 있다. 공직자들은 CPIB로부터 문의가 들어왔을 때 보유 재산의 형성 내역을 완벽하게 설명해야 한다. 해명하지 못하는 재산은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것으로 간주한다. CPBI의 요청이 들어오면 법원은 관련 공무원의 재산권 행사를 동결하거나 압류할 수도 있다. 민간 기업의 장부까지 직권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당근도 채찍 못지 않게 강력하다. 싱가포르 고급공무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월급을 많이 받는다. 현재 리센룽 총리의 연봉은 200만싱가포르달러(약 13억원)에 달한다. 차관급만 돼도 연봉이 100만달러(약 6억5천만원) 가량 된다. 아주 유망한 관료는 30대 초반에 30만달러(약 2억원)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놨다. 공무원 입장에서 보면 열심히 일해서 월급만 잘 저축해도 평생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 부정을 저지를 이유가 별로 없다. 이 때문에 유능한 인재들이 정부 부문에 머물러 있고 정부 경쟁력이 유지된다.
한국과 싱가포르는 처한 여건이 많이 다르다. 싱가포르가 잘나가고 있다고 해서 그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남의 제도를 도입하려고 할 때 부작용이 생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항은 한국의 발전에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싱가포르는 외자유치를 할 경우 정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투자기업이 원하는 모든 사항을 종합적으로 해결해 줘야지 부분적 유인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나라도 최근 외국인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외국기업의 입장에서 종합적으로 볼 때에 얼마나 매력적인 여건을 제시하고 있는지 곰곰이 다시 따져봐야 할 것이다.
둘째, 싱가포르의 사례는 정부가 필요한 부문에서 어떻게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 혼자의 힘으로만 돌아가지는 않는다. 중요한 부문에서 정부와 시장은 맞물려 있다. 정부가 필요한 일을 잘 해야 시장도 잘 돌아간다. 싱가포르는 개방경제에서 민관협력 체제를 어떤 식으로 구축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뿌리내릴 수 없는 여건과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한국에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재정형편이나 국민 정서상 공무원 월급을 싱가포르와 같이 대폭 올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의 보수를 민간기업과 비교했을 때 적정수준에서 유지해주고 이들을 정예화시키려는 노력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부패감시기구는 CPIB처럼 보다 강력한 권한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또 고위 공직자 재산 규모만 등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무원에 대해 재산형성 과정에 대한 해명을 의무화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
2006.06.04 09:19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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