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서울대학교 역사학 관련 학과 교수들의 입장
서울대학교 역사학 관련 5개 학과 교수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의견을 지난 9월 2일에 교육부 장관께
전달하였습니다. 수많은 반대의견, 특히 학자·교사들의 압도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가 국정 교과서를 제작한다면 우리는 그와 관련한
어떤 작업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국민들께 밝히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지금 정부가 만들고자 하는 국정 역사교과서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그 자체로서 ‘올바르지 않은 교과서’입니다.
첫째, 국정 역사교과서는 역사교육의 본질에 위배됩니다. 바람직한 역사교육이란 학생이 다양한 사료와 방법론, 비판적 사고와 여러
방면으로 열린 역사 해석의 가능성에
입각하여, 역사 서술이 지닌 의미와 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돕는 것입니다. 정부가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해 제작한 단일한 교과서를 통해서는 역사교육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정부 여당이 법에 정해진 ‘국정’이라는 말을
피하여 ‘올바른 교과서’를 표방한 것이야말로 스스로 국정 교과서의 부당성을 인정하는 증거입니다.
둘째, 우리 헌법은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하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교육제도
법률주의’에 대하여 국가의 백년대계인 교육이 일시적인 특정 정치세력에 의하여 영향을 받거나 집권자의 통치상의 의도에 따라 수시로
변경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며, 교육이 외부세력의 부당한 간섭에 영향 받지 않도록 교육자 내지 교육전문가에 의하여 주도되고
관할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정부 여당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충돌합니다.
셋째,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세계 시민의 보편적 기준에 어긋납니다. 2013년 유엔총회에 제출된 유엔 인권이사회의 보고서에서는
국가에 의한 단일한 역사교과서의 장려는 인권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고, 교육받을 권리, 문화적 권리, 의사 표현의 자유 및 알
권리와 상충하며, 학문의 자유에 대한 부당한 규제를 동반한다고 선언하여 국정 교과서로 역사를 교육하는 데 반대하였습니다.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는 것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위상을 크게 훼손할 것입니다.
넷째,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은 평화통일과 세계사 교육에 대한 지향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북한과의 평화적 통일은 헌법이 규정한
대한민국의 역사적 과제이지만, 국정화를 추진하는 논리에서는 그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전망은 없습니다. 한편 국정화가
필요하다는 논의는 한국사, 그 중에서도 해방 이후 현대사에 초점을 맞출 뿐이어서 우리 역사교육에서 절실한 세계사와 한국사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외면합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추진되는 국정 교과서에서 한국 사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역사교육에서 국정 교과서라는 형식 자체가 옳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 또한 크게 우려됩니다. 집권 여당의 대표 등 고위
정치인이 나서서 국정 교과서의 서술 방향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헌법의 교육이념 및 역사교육의 원칙에 위배됩니다.
더구나 정부가 교과서를 독점 제작하는 목적이 ‘올바르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치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세계의 역사에서 이미 명백히 확인된 사실입니다.
국정 역사교과서를 주장하는 이유는 현행 검정 교과서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좌편향 역사교과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행
교과서에 국가에 반하는 내용이 들어갈 여지는 없습니다. 더구나 그 교과서들은 현재 여당이 집권한 후 정부에서 결정한 상세한 지침을
따라 집필되었으며, 그 책들을 검정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승인한 이는 현 정부의 교육부 장관입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부정하는 역사교과서’라고 외치는 국정화 정책은 정부 여당이 자신을 부정하는 심각한 모순 위에서 추진되고 있습니다.
집권당에서는 국사학자의 90퍼센트가 좌파라고 하면서 국정화 정책을 꼭 이겨야만 하는 전쟁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현재 대학과 초 중등학교에서 한국
사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와 교사들은 우리나라의 교육제도 속에서 오랜 기간 수련하고 학위와 자격을 인정받은 이들입니다.
국사학자들을 근거없이 좌파로 규정하는 것은 밖으로 대한민국을 오해하게 하고 안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불안하게 합니다. 반대 의견을
지닌 국민을 싸워 물리칠 전쟁의 대상으로 삼는 정책은 올바른 것일 수 없습니다.
2017년부터 국정 교과서를 사용할 것이라는 계획도 그것이 매우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정책임을 보여줍니다.
그 계획은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9월 23일에 고시한 교육과정에 위배됩니다. 중고등학교 새 교육과정은 2018년에 처음
시행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1년 6개월 만에 새로 집필하여 교육 현장에 보급될 교과서가 뛰어난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정부 여당이 이러한 무리와 혼란을 무릅쓰고 국정화를 추진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부 여당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동 서양사, 고고학, 미술사학, 역사교육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현장의 교사 절대 다수가 반대하고,
시민들의 여론에서도 우위를 누리지 못하고 거의 모든 언론이 반대한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정책을 포기해야 합니다. 시민과 전문가들의
빗발치는 반대의견을 무릅쓰고 국정화를 강행한다면 그 교과서의 내용 또한 역사교육의 본질이나 시민 여론을 아랑곳하지 않고 구성될
것입니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은 수많은 학자 사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이상입니다. 만일 정부 여당이 끝내 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한다면 역사 연구 및 교육을 담당한 우리는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기 위한 본연의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국정 교과서의
집필에 참여하지 않음은 물론, 연구 자문 심의 등 일체의 관련 업무에 협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뜻을 같이하는 역사학자와
역사교사들과 힘을 합해, 역사교육의 본질에 입각한 성찰적인 대안적 역사교재와 참고자료를 제작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교육부의 국정화 정책 행정예고에 대해 오늘 우리는 위와 같은 반대 의견을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께 발송했습니다. 이제라도 정부 여당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정책을 취소하기를 기대합니다.
2015년 10월 22일
서울대학교 교수
국사학과: 권오영, 김건태, 김인걸, 남동신, 문중양, 오수창, 이상찬,
정용욱, 허수, Milan Hejtmanek
동양사학과: 구범진, 김병준, 김형종, 박수철, 박훈, 이은정, 조성우
서양사학과: 박흥식, 이두갑, 주경철, 최갑수, 한정숙
고고미술사학과: 김장석, 김종일, 이선복, 이주형, 이준정, 장진성,
David Wright
역사교육과: 김덕수, 김태웅, 박평식, 서의식, 양호환, 유용태, Ike Susu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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