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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Info/Restaurant

[정동현·한끼서울]용산역 닭갈비



용산역 인근에 위치한 오근내 닭갈비


정동현 맛있는 한끼, 서울 ⑤용산구 오근내 닭갈비


등대사진관에 가기 위해서는 철길을 건너야 했다. 용산역 앞 골목은 좁고 불빛이 적고 어두운 편이어서 차를 몰기 어려웠다. 그곳에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초원사진관을 연상케 하는 작은 사진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굳이 이촌동까지 간 이유는 그곳이 150년 전 사진 기법인 틴타입(Tintype)으로 촬영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틴타입 사진이란 철판에 인화를 하여 단 한 장의 사진만 남고, 또 그 사진이 100년을 넘게 간다고 한다. 철판에 새기듯 사진을 찍으니 당연한 말이다.

“어떻게 알고 오셨죠?”


베토벤처럼 희끗한 갈기머리에 맑은 눈을 한 사진작가가 우리를 보며 도리어 물었다. 퇴근한 지친 몸을 이끌고 이촌동 한적한 어귀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사진은 셔터 한 번에 한 장이었다. 한 장을 찍을 때마다 철판을 갈아 끼워야 했다.


사진관에 전시된 사진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아주 검은색부터 밝은 흰색까지 어두워 묻히거나 밝아서 사라진 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모든 세부가 철판 위에 낱낱이 드러나 있었다. 사람들 눈동자는 형형히 밝게 빛나고 셔터 앞에 섰을 그 손 끝의 미미한 떨림도 철판에 올라와 있었다.



오근내 닭갈비 외관


조건을 듣고 촬영 날짜를 잡았다. 작가는 좁은 길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차에 들어와 앉으니 다시 이 어두운 동네 안이었다. 시간은 늦고 배가 고팠다. 건너 온 철길 너머로 밝은 불빛이 보였다. 불에 이끌려 그리로 움직였다. ‘오근내닭갈비’라고 쓰인 간판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주변은 모두 단층 건물이었다. 멀리 보이는 용산역 주위로 검푸르게 보이는 빌딩이 찌를 듯 서 있었다. 이곳은 그 높은 기세에 눌려 시들고 만 풀들이 모여 있는 작은 폐허 같았다. 그러나 그 폐허에도 꽃은 피고 풀이 자란다. 오근내닭갈비에 들어서자 마치 사막 오아시스 마냥 사람들이 몰려 앉아 닭갈비를 먹고 있었다. 그 면면을 살피니 하나 같이 살이 뽀얗고 말에 복선이 없는 젊은 축이 대다수였다. 종업원도 비슷한 또래였다. 그들은 빠르고 움직이고 땀을 적게 흘렸다. 닭갈비 집에 왔으니 먹어야 할 것은 당연히 닭갈비였다. 모든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달걀찜도 추가했다.


숯불이 아닌 두꺼운 철판 위에 닭갈비가 올라왔다. 석쇠에 굽는 것에 비해 물이 많이 나오고 대신 채소 등 이것저것 섞어 먹기 좋은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양을 늘리기 쉽다는 뜻이다. 근래 이런 집들은 한국인 기호에 따라 다리와 넓적다리 살만 골라 쓴다. 닭갈비라는 말은 더 이상 닭 부위가 아니라 이런 요리의 총칭이 되었다. 고추장 등을 섞어 만든 양념에 닭고기와 양배추, 고구마, 파 등을 넣고 철판에 볶은 일종의 두루치기다.



이름과 달리 다리와 넓적다리살 위주로 들어있는 `닭갈비` 전문점이 많아졌다


옆을 보니 닭갈비에 떡, 고구마, 라면 같은 것을 추가해 닭갈비 보다 그 나머지가 더 많았다. 달갈비를 굽는 것은 종업원과 손님이 나눠 했다. 바쁜 종업원은 주문을 받고 손님 사이를 돌아 다니며 닭갈비가 타지 않았는지 검사했다. 손님은 “타지 않게 뒤집어주세요.”라는 종업원의 말을 잘 따라 엉거주춤 주걱을 잡고 뒤집는 척을 했다. 몇 분을 뒤집으니 얼추 익은 것 같았지만 종업원은 “떡부터 드세요.”라는 말로 우리를 저지 했다. 고추장 양념이 엉겨붙어 살짝 검게 그을린 떡은 상상한 맛 그대로였다.


떡 몇 점을 먹고 난 뒤에는 드디어 닭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탄력 있는 살점은 이를 튕겨내는 것 같았다. 진득한 고추장 양념은 생각보다 매웠다. 뜨거운 기운이 잔뜩 서린 닭고기와 채소를 섞어 입 속에 집어넣었다.


터질듯 부풀어 오른 달걀찜도 숟가락 가득히 펐다. 소주와 맥주병을 테이블에 올리고 붉은 얼굴로 서로를 보며 웃고 떠드는 젊은 남녀로 실내는 가득 차 있었다. 모든 테이블 위에서 닭갈비는 익어가고 매운 기운에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오래 전 저런 끓는 피로 춘천행 열차를 탔던 때가 있었다. 오래 전 필름을 갈아 끼우며 한 장 한 장 소중히 셔터를 누르던 때가 있었다. 그 골목에는 기억 대신 감각으로만 남은 푸른 시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후로 등대사진관을 찾지 않았다. 하루의 피로는 무겁고 사진 한 장 은 가벼웠다. 약속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나이가 들어 피가 식은 나는 이제 하루를 살지 않는다. 그렇게 단지 유예할 뿐이다.



[출처 : http://mediahub.seoul.go.kr/archives/1096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