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 맛있는 한끼, 서울 ⑧ 서대문구 전라도 식이네집
자리에 앉자마자 큰 소리를 들었다.
“저기 앉지 말라고. 복잡해서 안 된다니까!”
다행히 우리를 향한 소리가 아니었다. 우리 다음에 들어온 중년 남자 일행에게 날아온 불호령이었다.
우리가
둘, 저쪽이 넷이었다. 간발의 차로 우리가 자리 잡은 테이블은 홀 중앙이었고 남자들은 우리를 피해 머뭇머뭇 거리다 문 옆
테이블에 앉으려던 찰나였다. 홀 중앙에 앉아있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그 소리 원천이었다. 문 옆이라 오고 가기 복잡하다는
고함이 뒤따랐다.
“아참, 이제 욕쟁이 할머니라고 불러야겠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남자가 자리를 옮기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할머니가 그대로 받아쳤다.
“그래. 욕쟁이 할머니라고 불러.”
그 목소리에는 화가 없었다. 대신 속을 감추지 못하는 솔직함이 있었다. 그 남자들은 의자가 없는 상에 앉았다. 그네들이 말하는 소리가 우리 테이블까지 들렸다.
“내가 이번 주에만 이 집을 네 번째 오는 건데 말이지 아주 좋아.”
그 남자가 일주일에 네 번이나 찾은 그 집은 남가좌동 모래내 시장 초입에 있는 ‘전라도 식이네집’이다.
메뉴를 보면 딱히 전문으로 하는 음식은 없어 보인다. 가짓수가 많아서다. 홍어를 시작으로 오리로스, 오리훈제, 닭도리탕, 추어탕,
묵은지고등어조림, 갈치조림, 청국장, 김치찌개, 삼겹살 등등 하지 않는 음식을 찾는 것이 빠를 것 같다.
대충 보면 이북 음식을 제외한 일반 대중 음식 일체를 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경험 상 헤매기 쉬운 메뉴판
앞에서는 ‘다음에 또 오면 된다’는 식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이런 곳에서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머뭇거리다가는 본의
아니게 핀잔을 듣기 쉽다.
“삼겹살하고 고등어조림 주세요.”
나의 빠른 주문에 할머니는 “그래, 다 해줄게”라며 말을 받았다. 장난스럽게 둥글둥글한 간판 글씨체만
보면 시장 흔한 밥집 같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곳에서만 39년을 장사한 집이다. 김치, 간장, 고추장, 된장을 직접 만들어
쓴다는 안내문을 보면 이 집 자존심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자존심은 허언이 아니다. 삼겹살에 딸려오는 반찬 가짓수와 면면을 보니 ‘가볍게 한 끼’라는 생각부터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푹 익은 갓김치와 파김치, 부추김치, 열무김치, 묵은지, 멸치볶음, 무절임, 양파절임, 갈치속젓,
토장, 근대무침, 가지무침, 갈치부침 등이 깔렸다.
부글부글 끓는 청국장은 반찬 다음에 상 위에 올랐다. 냄새부터가 달랐다. 쓴맛이 살짝, 하지만 구수하게
속을 훑는 굵은 맛은 근래 구경하지 못한 걸걸한 청국장이었다. 욕을 할 기세로 남자들을 나무라던 주인장은 그 무렵 남자들 옆에
앉아 오미자 술을 받으며 웃고 있었다.
“내가 담양에서 태어나서 완도에서 오래 살았어. 반찬 하나하나 내가 다 만들어. 이 갈치 속젓도 내가 다 아가미, 내장 따서 만든거야. 따로 국물이 나오면 그걸로 묵은지를 담궈. 그러니 맛이 없을 수가 없지. 이 파김치는 작년 5월에 해서 삭힌 거야.”
주인장 큰 목소리가 홀을 가로질러 내 귀에 들어왔다. 굳이 그 설명이 없더라도 반찬 하나하나 선이
분명했다. 시간을 두고 익은 반찬들은 산미가 확실했고 그래서 밥에 얹어 입에 넣을 때마다 침이 잔뜩 흘러나왔다. 도저히 밥 한
그릇으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칼로 툭툭 자른 삼겹살은 껍질이 붙어 쫀득한 맛이 살아있었다. 무엇보다 솥뚜껑 위에 올려 구워먹으니
재미가 있고 맛도 확실했다. 노릇하게 구운 삼겹살을 집에서 뜯어왔다는 씀바귀와 상추에 싸서 입에 넣었다. 쓰고 달고 기름진 맛이
입에서 감돌았다.
묵은지와 고등어를 조린 국물을 떠서 밥에 비볐다. 이런 반찬을 앞에 두고 밥 두 공기를 비우는 것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만큼 쉬웠다.
마지막 고기 한점을 입 속에 넣을 때쯤엔 배가 불러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조금 남은
갈치 속젓을 기어코 해치우고 말았다. 짜고 달고 시큰했다. 그리고 그 고소한 맛은 해풍에 말린 생선들에게서 풍겨나오는 바다의
맛이었다.
차를 몰고 모래내 시장을 빠져나올 때 주인장이 살았다는 완도 풍경이 떠올랐다. 너른 바다와 작고 많은
섬. 서울 시내 시장 한 편에 자리 잡은 전라도 식이네집은 작아서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남도
섬이었다.
[출처 : http://mediahub.seoul.go.kr/archives/110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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