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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III/Thinking

공연계 Me Too

공연계 Me Too│① 모두 바뀌어야 한다


글 서지연, 디자인 전유림/2018년 3월 5일



지난 2월 25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는 ‘With You’ 시위가 벌어졌다. 이는 2월부터 시작된 ‘Me Too’ 운동에 대한 관객들의 대답이었다.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연출가의 성폭력 사실이 밝혀진 후 한 달 여 동안 ‘Me Too’ 운동은 연극계를 비롯해 한국사회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With You’라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Me Too’ 운동은 연극계를 중심으로 확대되었지만, 비단 연극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 ‘With You’ 시위에서는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과 함께 연대의 의지를 밝히는 참가자들이 적지 않았다. 지난 2월 26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Me Too 운동 긴급 토론회’에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했으며, 그 중 상당수가 성폭력 피해자들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분노했고, 마치 하나인 것처럼 목소리를 냈다. 앞서 1월 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서지현 검사는 검찰 내부에서 성폭력을 당했으며 검찰이 이를 묵인하고 오히려 피해자인 자신을 조직에서 배척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어 연극계 ‘Me Too’ 운동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분야를 막론하고 여성들이 성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의 권력구조였다.

연기과 졸업생 A는 여성들이 학교에서부터 이러한 권력구조에 익숙해진다고 말한다. 그는 학교를 다니던 시절 언제나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입학 후 선배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준 것은 인사하는 법이었으며, 그들은 무엇보다도 단체생활과 위계질서를 강조했다. 학생들이 잘 보여야 했던 대상은 교수나 감독으로, 대부분 남성이었다. A가 이번 ‘Me Too’ 운동을 통해 예술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유명 배우들의 가해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던 것은, 그가 대학을 다닐 무렵부터 한번쯤 들어봤던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A는 “학교 안에서조차 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데, 유명하기까지 하면 그야말로 절대 권력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연출과를 졸업하고 바로 극단생활을 시작한 연극배우 B는 그런 권력관계에서 벗어나고자 교수나 선배가 없는 극단에 들어갔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극단 내에서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이야기하면 ‘예민한 애’ 취급을 받는다. 나서는 사람을 미워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것이 성공의 조건이 되면, 그 잘 보여야 하는 대상은 자연히 권력을 가진다. 그리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개인의 목소리를 묵살하는 공동체에서 약자는 너무도 쉽게 폭력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권력은 왜 남성들에게 집중되는가. 연극배우 B는 “상대적으로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기회자체가 적다”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남성 캐릭터 중심 공연의 비중이 훨씬 높고, 이러한 서사에서 여성 캐릭터는 대상화되거나 보조적 존재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는 “국립극단조차 최근 몇 년간 시즌 단원을 뽑을 때 남성단원을 더 많이 뽑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B가 졸업한 연출과의 경우 10명 중 8명이 여성이었지만, 정작 그는 업계에 발을 들인 후 여성 연출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했다. ‘Me Too’ 운동을 통해 한국 사회의 위계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은 여성 중견의 부재가 공연계 뿐 아니라 한국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결혼 및 육아로 인한 여성의 경력 단절을 주요 원인으로 꼽으며 “공연에 들어가면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다 같이 연습실에서 보내는 것이 당연시 된다. 가사노동과 육아를 병행하기 불가능한 구조적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여성들이 무대에서 사라지는 동안, 남성들은 극단의 대표이자 연출가, 교수나 심사위원이 되어 권력을 쌓는다.

아이러니 하게도, 극단의 열악한 환경은 이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한다. 자력으로 공연을 올릴 수 없는 대부분의 극단에서 지원금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리고 지원금을 받는 과정에서는 극단의 명성이나 유명 연출가, 배우의 유무 등이 고려된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은 “지원서 신청단계에서 지원금을 어떻게 배분할지 구체적인 계획서를 제술한다. 지원서 작성을 극단 대표가 한다면 교부된 지원금의 분배 권한 또한 극단 대표에게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모든 경제적 권한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다. 이렇게 받은 지원금이 적을 경우, 대부분 극장 대관료와 연습실 사용료로 지출되기 때문에 단원들은 아무런 개런티를 받지 못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이 계속 유지되는 이유는 극단을 나가면 공연에 서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폭력 위험까지 더해지면, 여성은 자신의 커리어와 인권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극단적 상황까지 몰린다. 반면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이 잃는 것은 무엇인가. ‘여성문화예술연합’의 신희주 대표는 법적 처벌만으로는 이런 악순환을 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2016년 ‘OOO 내 성폭력’이 공론화된 이후 결성된 ‘여성문화예술연합’은 2017년 2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에 성폭력 전담 기구 설립과 실태조사, 성희롱 예방 프로그램 등을 제안해왔다. 신 대표는 “‘이제 뭘 어떻게 더 해야 할까’ 고민할 때 ‘Me Too’ 운동이 시작됐다. 그제야 문화체육관광부가 우리가 가져갔던 법안들을 그대로 발표했다. 너무 화가 났지만 이렇게라도 문화체육관광부가 이 일의 주무가 되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문화예술계 ‘Me Too’ 운동과 관련해 여성가족부가 아닌, 문화체육관광부가 나서야 한다고 보는 이유는 사법적 처벌만으로는 가해자의 권위를 뺏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 대표는 “과거 이런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가해자가 국가 지원금에서 제외되는 일은 없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나서 가해자들을 조사하고 이들이 받는 혜택과 명성을 전면 차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법안이 제대로 실행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대중 앞에 나선 수많은 피해자들은 무방비하게 방치될 수도 있다. 신 대표는 “2016년 ‘OOO 내 성폭력’에 대한 관심이 식은 후 바로 가해자들의 보복성 고소가 시작됐다”며 “법률지원기금 등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 대비가 하루 빨리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려놓겠다”는 가해자들의 말은 이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반면 피해자들은 이들이 사라진 후에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보복에 대비해야 한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권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어제, JTBC ‘뉴스룸’에서 충남도청 김지은 정무비서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했다. ‘합의하에 이루어진 관계’라는 안희정 지사의 반박에 대해 그는 “저는 지사와 합의를 하는 사이가 아니다. 지사는 제 상사고 저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 저와 지사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선 후보였을 만큼 권력을 지닌 남성이, 그 권력이 충실히 기능하는 구조 안에서 얼마나 손쉽게 여성의 인권을 짓밟았는지 우리 모두가 똑똑히 목격했다. 그래서 ‘Me Too’는 피해자, 혹은 피해자가 속한 집단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권력구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월 4일 ‘한국여성대회’ 축사에서 “최근 우리 사회는 #me_too 운동과 함께 중요한 변화의 한가운데 있다. 이제 우리는 사회 안의 성차별적인 구조가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 다시금 성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본질적으로 약자에 대한 일상화된 차별과 억압의 문제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앞서 2월 26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Me Too’ 운동을 지지한다”고 말한 이후 두 번째다. 그 발언 후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 대책위원회’를 구성할 계획이며 3월부터 ‘예술분야 전담 성폭력 신고 상담센터’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는 단순히 사태 해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변화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이것은 약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문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꼭 ‘Me Too’가 아니어도 언제든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가해자보다는 피해자를 검열하는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 가해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는 등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언론이 이를 그대로 보도하며 특종에 열을 올리는 작태는 ‘Me Too’ 운동을 이슈로 소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피해자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 사회전체가 자신들에게 연대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범죄자들을 단죄할 법과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당장이라도 변화할 수 있다. 권력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을 더 이상 묵인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누군가의 인권을 짓밟은 사람을 어떤 경우에서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얼핏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느껴져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절망하지 않고 “Me Too”를 외친 사람들처럼, 결국 이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개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