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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Info/Restaurant

[정동현·한끼서울]영동시장 ‘배꼽집’

배꼽집 불고기


정동현 맛있는 한끼, 서울(33) 영동시장 ‘배꼽집’


영동시장은 강남의 정글이다. 서울의 중심인 강남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은 작은 골목은 주차도 쉽지 않아 그 흔한 발렛파킹도 드물다. 하지만 이 작은 정글은 그만큼 작은 음식점들이 모인 하나의 생태계다.


신논현과 논현역 사이, 인근 높은 오피스타운에서 먹을 곳을 찾지 못한 직장인들이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곳이 영동시장이고, 저녁이 되면 낮의 치욕과 굴욕을 잊어버리려 다시 찾는 곳이 또 영동시장이다. 하지만 정글 같은 영동시장에서 음식 장사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하루 걸러 한 집이 문을 닫고 하루 걸러 한 집이 다시 문을 연다. 그래서 영동시장은 정글이자 해병대 훈련소다. 이곳에서 이름을 날린 집은 다른 곳에 가서 더 크게 문을 열고 반드시 손님 줄을 길게 세운다.


몇 년 전 남들보다 오래 서 있고 오래 고민하는 야심만만한 어떤 이가 영동시장 골목 지하에 가게를 열었다. 그 이름은 ‘배꼽집’. 이름만 보면 뭐하는 곳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지하로 내려가면 알게 된다. 왜 이곳의 먹는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들고 여름이면 냉면 하나에 긴 줄이 세워지는지.


배꼽집의 정문은 그럴듯하지만 문을 열면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벽에 빼곡한 메뉴판과 어두운 실내를 보면 영동시장에 있는 집답다. 모여드는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잡으려는 절박한 의도다. 그러나 그런 집 치고 제대로 맛을 내는 집이 없다는 선입견은 여기서는 잠깐 잊어도 좋다. 배꼽집은 정글의 베테랑처럼 다재다능하고 능수능란하다.


이 집에서 가장 빨리 완판 되는 메뉴는 갈비탕이다. 이제 서울에서 1만 원 안쪽으로 갈비탕을 먹을 수 있는 곳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소 한 마리에서 얼마 나오지 않는 갈비는 구워 먹든 끓여 먹든 가장 고급품이다. 수요는 많으나 공급은 얼마 되지 않으니 그 값이 오르는 것은 굳이 자본주의 논리를 배우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수요와 공급이 엇갈리는 교차점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어르고 달래도 돈은 차갑고 이윤은 박하다. 하지만 이 집은 그 이윤을 더욱 박하게 만들어 값을 싸게 만들고 그래서 손님을 더 끌어 모으는 전술을 택했다.


말은 쉽지만 티끌 모아 태산을 이뤄야 하는 지난하고 고된 작업이다. 값이 싸다고 맛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잡내 하나 나지 않는 갈비탕의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면 담백하면서도 고소하고 기름진 모순된 감각이 펼쳐진다. 밥을 말면 든든하고 파를 넣으면 향긋하며 후춧가루를 조금 뿌리면 칼칼한 하얀 백지 같은 맛이지만, 그 백지의 결은 단단하고 붓질을 하듯 숟가락질을 할수록 펼쳐지는 색의 넓이가 다르다. 이만하면 어디 가서 불평할 수 없는 맛의 갈비탕이다 싶다.



인기 메뉴인 갈비탕과 평양냉면



평양냉면은 한 수 더 뜬다. 시중 평양냉면 값 역시 갈비탕처럼 1만 원으로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 되었다. 요식업자의 폭리도, 저열한 양심 탓이 아니다. 이 역시 비정한 자본주의의 논리다. 원재료 값이 비싸니 당연히 비싸다. 게다가 그 맛을 내는 기술자도 몇 되지 않아 값이 비싸다 해도 대안이 별로 없다. 그 몇 안 되는 집에 여름이 되면 사람들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몇 십 분을 기다리고 매체에서는 냉면집 순위를 매기기 바쁘다.


배꼽집은 1만 원도 안 되는 값에 수십 년 된 장안의 노포를 앞지르는 맛을 낸다. 단단히 또아리진 면에 젓가락을 푹 찍고 기중기로 들어 올리듯 힘껏 면을 젓가락에 말아 입에 욱여넣는 것이 첫째 순서. 이로 면을 씹으며 그릇 채 냉면 육수를 입에 붓는 것이 둘째다.


그러면 펼쳐지는 것은 소고기 단백질의 아미노산이 펼쳐내는 부드럽고 진득한 맛, 그 안개처럼 매끈하게 메우는 욕(欲)의 맛이요 그 뒤로는 땅에 뿌리박고 차갑고 험한 날씨를 견딘 곡물의 거칠지만 올곧은 정(正)의 맛이다. 그 둘이 합해지면 혀를 즐겁게 하고 배를 무겁게 채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신이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 그리하여 아무리 이 음식을 먹어도 물리지 않는 것이다.


비록 수입육이지만 기본기 확실한 맛에 불만이 있을 수 없는 불고기와,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고기를 내놓는다는 모둠 구이 한판을 보노라면,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살아남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만들어내는 자가 살아남는다. 그 이유가 확실한 곳이 배꼽집이었다.



[출처 : http://mediahub.seoul.go.kr/archives/1150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