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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III/Thinking

인간 통일성의 일곱 단계- 5. 민족/국가

우리는 흔히 "민족과 국가"라는 말을 쓰지만, 엄밀히 말해 민족과 국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민족은 언어, 문화, 역사, 그리고 유전자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고, 국가는 하나의 정부가 다스리는 정치적 단위입니다. 


따라서 과거엔 하나의 민족이 여러 국가를 이루고 살거나, 하나의 국가에 여러 민족이 속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국가와 민족은 원래 연관이 없지만, 둘 사이에 중요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크기입니다. 


국가는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어느 정도 크기를 갖추어야 하고, 따라서 도시국가가 아니라면 스위스 정도가 최소의 크기입니다. 민족도 어느 정도 크기가 되지 않으면 다른 민족이나 부족에 흡수되기 때문에 민족으로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유럽에는 삼천만 명에서 오천만 명 규모의 민족이 많은데, 이는 국가를 구성하기에 적합한 크기입니다. 물론 교통, 통신 기술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행정조직이 발달하지 않았던 중세엔 민족을 단위로 통치하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민족 단위의 국가가 적었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경제가 급격하게 발달하고, 이는 곧 새로운 행정조직을 창조하면서 민족을 기반으로 한 정치조직인 민족국가(nation-state)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민족국가의 개념은 곧 민족주의와 연결이 됩니다. 유럽에서 나타난 민족주의는 19세기에 세계 곳곳으로 퍼지면서 다양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특히, 민족국가가 이미 형성되었던 동아시아는 다른 지역보다 이 개념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미 16세기에 민족국가 건설에 성공한 일본은 민족주의의 열기를 바탕으로 다른 민족을 지배하기 원했고, 곧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게 됩니다. 


민족국가의 전통이 천 년이 넘은 조선은 유교의 관점이 아닌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보게 되었고, 이는 곧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독립신문, 독립문 등으로 표현)으로 발전합니다. 중국에서는 중국인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한족의 민족의식이 높아지면서 만주족이 이끄는 정부에 반발하게 되고, 이는 곧 청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유럽의 민족주의는 이처럼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아프리카에선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엔 부족은 많았지만, 민족이라고 부를만한 집단은 적었고, 따라서 민족주의가 발달할 여건이 안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줄루족은 인구가 천만 명이 넘으니 민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아프리카라는 넓은 지역에 다른 부족과 섞인 채 흩어져 살기 때문에 이들이 민족의식을 키워 독립국을 건설할 상황은 되지 않습니다


. 이렇게 민족의식을 형성할 여건이 안되는 가운데 식민지배가 끝나고, 아프리카는 지도에 그은 선을 따라 국가가 들어섭니다. 이렇게 인위적으로 탄생한 국가 안엔 수많은 부족이 존재하고, 이들은 국가라는 통일성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에 다른 부족과 갈등이 발생하면 바로 내전으로 진행되기 마련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크고 작은 내전이 끊이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민족의식의 결여는 아프리카의 경제발전에 큰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그 나라 사람들이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최소한 법을 어겼을 땐 처벌을 받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활동이 위축돼서 경제가 발전하기 어렵죠.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같은 부족끼리는 서로 형제, 자매 대하듯 하지만, 부족이 다르면 서로 신뢰하지 않고, 따라서 경제적으로도 거래하길 꺼립니다. 만약 다른 부족 사람과 거래를 하다가 사기를 당한다면, 정부와 경찰도 결국 부족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죠(실제로 최근에 벌어진 리비아 사태를 봐도, 카다피는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카다파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처럼 부족을 넘어서는 경제활동이 활발하지 못하기에 자원의 분배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은 모두가 가난을 못 벗어나는 것이 아프리카가 가난한 원인의 하나입니다.

민족국가의 전통이 오랜 한국에서 한 민족이 한 국가를 형성하고 산다는 개념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세상의 어느 국가도 한 민족만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없습니다. 모든 국가엔 외국인이 있고, 이들이 현지인과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DNA와 문화의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한국만 봐도 과거에 중국, 일본인들이 한반도로 건너와서 정착한 예가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한국인도 중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간 예가 많죠. "단일민족"이라는 말은 이러한 사례를 모두 "예외"로 처리해야 가능한 주장으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생각입니다. 특히, 최근엔 한국인의 10% 이상이 외국인과 결혼하면서 "우리는 단일민족이다."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죠. 


한 국가에 이민자가 늘면서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무너지는 모습은 이미 유럽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독일은 게르만족만의 국가가 아니라 게르만족과 터키인들의 국가로 변했습니다. 프랑스는 프랑스인과 북아프리카인들의 국가라고 할 수 있죠. 


이처럼 민족국가의 시대가 끝나고, 다민족이 한 국가에 모여 사는 시대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이 국가를 더 중요시할 것인지, 아니면 민족을 더 중요시할 것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예를 들어, 영국에 사는 아랍인이 "영국"을 중요시하는지, 또는 "아랍"을 중요시하는지에 따라 이라크에 주둔한 영국군을 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겠죠. 그렇다면 국가 지도자들은 국가의 통합성을 강조하겠지만, 국가보단 우리 민족이 중요하다는 민족 지도자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국가와 민족 개념의 충돌은 21세기에 중요한 사회 긴장의 원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20세기와 더불어 민족국가의 시대가 끝난 이상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죠

 

 

[출처 : http://cimio.net/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