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 무렵 한국정보통신진흥원(NIPA)에서 뉴욕연수를 온 젊은 후배들을 만났을 때다. 강연이 끝나고 식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고, 후배들은 나에게 미국 회사의 분위기나 진출 방법 등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내 개인적인 경험은
한계가 있고, 따로 정답이 있는 질문도 아니므로 우리의 대화는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처럼 각자 자기 생각을 밝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미묘한 엇박자가 존재했다. 나는 중요한 것이 프로그래밍 실력이라고 보고 실력을 어떻게 키울지 설명하는데 집중했는데, 후배들은 내 말을 자격증을 획득하는 행위로 치환했다. 예컨대 영어를 일정한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면 어떤 영어시험성적이 필요한지 물었고, 프로그래밍 실력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면 어떤 자격증을 따는 것이 좋은지 물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점수와 자격증이라니.
그런 것은 진짜 ‘실력’을 쌓는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진짜 실력을 쌓는 행위를 가로막고 억압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진짜 실력은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공부’할 때 쌓이는 것이 아니라 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프로그래밍에 몰입할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에도 순기능은 존재한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디버깅 방법이나 프로그램 설계 기술을 익힐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단편적인 지식은 실력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나는 미국에서 오랜 시간 프로그래머로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방식의 인터뷰를 경험해보았다. 지금까지 했던 인터뷰를 합하면 스무 번이 넘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인터뷰 중에서 점수나 자격증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 심지어 대학 시절에 받은 학점조차 따지는 경우가 드물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인터뷰 과정에서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어려운 질문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끈끈하게 자기 논리를 구성해 나가는 힘일 뿐이다. 이력서에 자기가 받은 점수와 자격증을 늘어놓거나 무언가를 미리 외워 와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여담이지만 미국에서 살다보면 멕시코 출신 이민자들을 많이 보게 된다. 레스토랑에서 테이블 정리를 하거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나르거나, 동네 잔디를 손질하거나, 이삿짐을 나르는 사람은 대개 멕시코 출신 이민자다. 한국 사람이 많이 사는 팰리세이즈 파크라는 동네에 가면 길 한쪽에 멕시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고 서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승합차가 다가와서 몇 명을 태우고 가는 장면도 흔히 목격된다. 일감을 찾는 사람을 일당을 주고 사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가 불법이민자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들은 미국에서 정식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없기 때문에 아무도 하지 않는 3D 업종을 선택하고, 낮고 불안정한 수입을 감내한다. 이러한 불법이민자의 수가 미국 내에서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는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지만,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불법이민자를 고용하며 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 일종의 암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추방은 답이 될 수 없다. 강력한 규제를 통해서 암시장의 규모를 제한하고 상당수의 불법이민자들을 합법적인 경제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민법 개혁에 정치적 역량을 집중하는 이유다.
한국에서 유난히 자격증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한 현상이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사람과 프로그래밍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획득한 사람으로 양분되어 있는 한국 프로그래밍 업계의 현실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원출신 프로그래머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는 멕시코 불법이민자들을 떠올렸다. 프로그래밍을 학원에서 배우는 것이 불법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적 메커니즘이 닮았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고 학원에서 속성으로 학습한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내면화한다. 불법이민자가 신분상의 약점 때문에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당한 처우를 감내하듯 회사에 취업하는 학원출신은 낮은 연봉과 취약한 처우를 감내한다. 이러한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프로그래밍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급여수준과 노동조건이 열악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대학에서 정식으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한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지켜보며 자괴감을 느끼고 개발자의 길을 포기한다. 차라리 치킨집을 오픈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현업에 있는 개발자보다 치킨집 사장님들의 프로그래밍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씁쓸한 농담이 회자될 정도다.
물론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사람만 개발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력이 있으면 누구든 개발자가 될 수 있다. 개발자가 되기 위한 별도의 자격(증)은 없다. 다만 대학공부는 현업에서 필요로 하는 실력을 갖출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프로그래머를 채용할 때 학부나 대학원에서 컴퓨터 공학이나 관련학과 전공을 기본적인 요구사항으로 적시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 역사나 미술을 공부한 사람도 당연히 프로그래머가 될 수는 있다. 다만 이런 사람들이 원하는 직장을 얻으려면 자신의 능력을, 자격증 같은 종이쪼가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비전공자가 (혹은 심지어 전공자가) 학원을 다닌다면 그 이유는 자격증을 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짜 실력을 키울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방문한 후배들이 프로그래밍이라는 일 자체의 재미와 행복에 집중하지 못하고, 점수와 자격증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동종업계의 일인으로서 나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대학에서 4년 (혹은 6년) 동안 컴퓨터와 관련된 전공과목을 공부하고, 회사에 취업이 확정된 사람들조차 더 많은 자격증을 향한 갈증을 느끼도록 만드는 한국시장의 메커니즘이 너무나 퇴행적이고 엽기적으로 느껴졌을 뿐이다.
프로그래머를 채용하는 회사들이 자격증을 요구하는 관행은 어쩌면 그들 자신이 프로그래머의 실력을 가늠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스스로 실력이 없으니까 채용과정에서 프로그래머의 진짜 실력을 가늠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격증’이 양산하는 값싸고 고분고분한 불법이민자를 선호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이러한 이야기가 국외자의 한담으로 들리지 않기를 희망한다. 프로그래머에게 자격증은 모욕이다. 이력서에서 자격증을 기입하는 칸을 당장 철폐하고, 실력만을 따지고 묻는 관행이 뿌리를 내려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업계의 체질을 혁신하기 위한 노력은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
칼럼니스트 : 임백준 이메일 : baekjun.lim@gmail.com
약력 :
한빛미디어에서 『폴리글랏 프로그래밍』(2014), 『누워서 읽는 퍼즐북』(2010), 『프로그래밍은 상상이다』(2008), 『뉴욕의 프로그래머』(2007), 『소프트웨어산책』(2005), 『나는 프로그래머다』(2004), 『누워서 읽는 알고리즘』(2003), 『행복한 프로그래밍』(2003)을 출간했고, 로드북에서 『프로그래머 그 다음 이야기』(2011)를 출간했다. 삼성SDS,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도이치은행, 바클리스은행 등에서 근무했고 현재는 뉴욕에 있는 모건스탠리에서 자바, C#, 스칼라 언어를 이용해서 금융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뉴저지에서 아내,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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