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한자로 제목이 붙여진 문서를 접하고 매우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 제목은 바로 품의서(稟議書)였다.
첫 번째 글자인 품(稟)자는 처음 보는 글자인데다가 품의서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괴상한 문서를 가지고 내내 씨름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윗사람에게 결재를 받으려고 품의서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위와 같은 상황을 경험했을 것이다. 처음 접하면 매우 생소한 것인데 시도 때도 없이 작성되어 결재가 이루어지며 직장인의 일상처럼 되어 있는 품의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조차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신입사원에게 품의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 이유는 자신도 배운 바가 없고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그 의미와 용도를 정확하게 가르쳐 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앞서 설명한 바 있는 조직 내에서의 권한, 책임, 직책 등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품의서의 정확한 의미와 용도를 알 길이 없다.
그저 품의서는 윗사람에게 결재 받기 위한 문서라고 알고 그냥 해 왔던 대로 반복적으로 문서를 작성할 뿐이다.
조직 내 모든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직책을 가지고 있고 - 사원도 하나의 직책이다 ?그에 상응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권한이 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 권한 범위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원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조직 내에 있는 각각의 직책에 대해 권한과 책임을 사전에 부여해 놓은 체계를 “위임전결”이라 하며 그것을 제도와 규정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 “위임전결규정”이다.
간혹 대표이사가 아닌 관리자 혹은 임원이 자신의 결재란에는 “전결”로 표시하고 대표이사의 결재란에 사인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 경우는 대표이사로부터 위임전결규정에 의해 권한을 위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결재는 대표이사가 결재한 것과 동일하며 “전결” 표시된 결재란이 자신의 회사 내에서의 실제 직책임을 의미한다.
품의서의 정확한 의미는 “내 상사의 권한을 빌리기 위해 상사의 허락을 받기 위한 문서”이다. 다시 말하면 품의서는 자신에게 위양된 권한 범위 내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상사의 권한과 자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지원을 약속받기 위한 문서이다. 품의서 결재를 받고 나면 품의서의 내용을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최종 결재권자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대표이사의 결재를 받았다면 그 품의서의 내용대로만 집행된다면 대표이사가 직접 집행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권한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품의서는 필요 없다. 그냥 실행하면 된다. 물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권한위양이 잘 되어 있는 조직에서는 품의서를 작성해야 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조직에서 품의서가 난무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품의서를 잘못된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보아 온 수 많은 품의서 중에서 진정한 용도로 사용된 경우는 10개 중 3개도 안 되었던 것 같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품의서의 왜곡된 용도는 책임 분산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상사의 권한을 빌리기 보다는 일이 잘못될 경우 상사한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품의서를 사용하는 경우이다. 심지어는 그것도 모자라 협의나 합의 과정을 통해 관련된 여러 부서의 책임자가 품의서에 사인하도록 하여 책임을 최대한 분산하기도 한다. 여러 사람의 책임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곡된 용도 중 또 다른 하나는 상사가 스스로 기획하였고 자신의 권한을 사용하여 추진하면 되는 일인데도 굳이 부하에게 시켜 자신을 최종 결재자로 하여 품의서를 쓰도록 하는 경우이다. 문서 작성이 귀찮아 부하직원에게 시켰다면 애교로라도 봐 줄 수 있지만 간혹 부하직원에게 거꾸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회계처리 상의 증빙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의미 없는 문서가 작성되고 쓸데 없는 일이 늘어나게 된다.
조직 내에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문서 중에는 “업무협조전”이라는 것도 있다. 업무협조전은 “조직의 책임자가 다른 조직의 책임자에게 도와 줄 것을 부탁하는 문서”이다. 일반적으로는 서로 독립된 조직, 이를테면 회사와 회사 간의 협조 요청 등에 사용된다. 하지만 하나의 조직 내에서 서로 다른 부서끼리도 업무협조전을 사용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어떤 조직이 내부에서 수 많은 업무협조전 발생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조직의 몇 가지 문제를 쉽게 진단할 수 있다.
우선 그 조직은 관료화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담당자와 실무자들 간의 대화와 협력으로 문제를 풀어가지 못하고 책임자들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부서간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 조직은 책임을 지지 않는 조직이다. 자신이 분명히 요청을 했었고 일이 잘못된 이유는 상대방에 있다는 것에 대한 증빙을 확보하기 위해 업무협조전을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정보통신의 발전에 편승하여 e-메일을 관련된 사람에게 보내 놓음으로써 업무협조전을 대신하여 자신의 책임을 전가시키거나 분산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경우도 많다.
권한위양이 잘 되어 있고 책임감 있으며 고객지향적이고 일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조직이라면 조직 내부의 부서간 업무협조전은 전혀 발생되지 않아야 한다.
권한을 많이 가지려 하고 책임을 적게 가지려 하는 것은 대부분의 조직 구성원들의 본능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능에 충실한 조직은 관료화되고 무책임하며 성과가 낮은 조직이 되고 만다. 그리고 책임 전가나 분산을 위해 수 없이 많은 문서들이 만들어지고 엄청난 규모의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지불한다.
조직의 관료화를 막고 성과 중심의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조직 내 권한과 책임의 체계가 확립되고 이를 통한 권한위양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책임을 전가 혹은 분산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 품의서가 작성되고 내부 부서간 업무협조전과 같은 책임 전가 증빙용 문서를 근절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경주해야 한다.
[출처 : 착한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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